이십년전만 해도 "이래서 한국영화는 안돼.." 한국영화는 대부분 극장에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70~90년대는 지금처럼 멀티플랙스 극장 시대가 아닌지라 서울시내 몇개의 개봉관이 개봉하는 영화상영 공간의 전부였고국민들에게 소개되는 외화도 일년에 몇편 되지 않아서선택권도 많지 않았다.
한국영화는 극장측이 의무상영 일자만 채우는 식으로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 이었고대부분이 특정 소재에 몰렸다. 70년대는 호스티스, 였고 아줌마 바람피는 이야기인 "모모부인 모모했네" 류가 80년대를 관통했다. 누가 얼만큼 벗었나 어느 여배우 가슴이 더 큰가로 경쟁하던 시기다. 90년대는만화책부터 영화계 까지 조폭들 이야기가 한국 문화 컨텐츠 시장을 휩쓸었다.한국영화 주인공은 다 조폭이었다.2천년대는 전부 재벌이었듯이.
국내 관객 최초 100만명 시대를 연것은 성룡의 '취권' 이었는데 성룡 영화 한두편만이 백만고지를 넘어 극장 주변을 사람들이 줄서서 난장판을 이뤘고 암표상들이 활개쳤었다. (취권이 백만 관객을 넘었다고 극장앞의 긴줄 사진으로 연일 신문광고에 몇달을 떠들던것을 어릴때 보면서 극장 입장할수 있는 나이(중학생)가 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는 영화 한편에 백만!! 이라며 다들 화제 였었는데..지금은 영화 한편에 천만 관객이라는 숫자가 이루어지는 현실도 믿을수가 없다.국민5명중 1명이 극장가서 그 영화를 본다는 이야기. 추억어린 시네마천국틱 극장을 밀어 버리고 멀티플랙스란 공룡이 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
성룡이 등장한 이후 80년대는홍콩 영화들이 한국 극장가를 점령했고 그에 비해 대부분 한국 영화는 3만명 관객이 제작비를 건지는 적정 흥행수준 이었다.스크린 쿼터제라고 해서 외화 수입 딱지를 얻기위해 한국영화는 대충 편수만 맞춰 제작돼고 상영되는 형식이 많았다.
워낙 한국영화 환경이 열악한지라 외화랑 경쟁이 안돼서 나라에서 강제적으로 외화수입을 규제하고 한국영화 제작과 상영을 의무화 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90년대초반엔 UIP 직배요구에 한국 영화가 사장될거라는 위기로 전 영화인들이 직배저지 시위를 한동안 벌였다.
국내 최고 국민 배우들이 앞장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시대적 시장개방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관객 입장에서는 애국심으로 재미없는 한국 영화를 일부러 봐야할 이유는 없다. 한국영화는 직배 개방으로 거의 망했다는 공포감이 한동안 지배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UIP 직배로 한국영화는 사장되지도 않았고 자유경쟁 시장에서 도리어 천만관객 시대를 열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있다.작품 수준도 세계시장에 당당히 진출해서 최고상을 받을만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위기의식이 도리어 자극제가 돼어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비약적 발전을 이룬것이다.
만약, 그 당시 영화인들의 요구대로 한국 영화 시장을 UIP 에 개방하지 않고 기존 방식대로 한국영화를 보호한다며 스크린 쿼터제를 고수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한국 영화는 마냥 그자리에서 외화 수입권을 얻기위한 의무 제작 수준에 계속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보호막을 거두고 거친 생존경쟁에 직격으로 내몰리자 비로서 저력이 드러 났다고나 할까.
미래를 볼수 있었다면 그 당시 영화인들이 그렇게 목숨걸고 직배 반대 시위를 하지는 않았을텐데.. 한 마디로 한국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잠재력을 믿지 못했기에 그런 비관적인 예측만 쏟아 냈었다는것이 지금에 와서야 증명됐다.
대중 음악계도 일본 노래를 카피하던 90년대 일본 시장이 개방돼자 일본과 저작권 논쟁으로 전 가요계가 큰 논란을 빚었지만 (당시 많은 인기 가요가 일본 노래를 표절한 곡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 BTS 가 몇년전엔 꿈도 못꿀 세계 정상을 누비고 있다. 영화계도 그렇고 음악계도 그렇고 시장개방이 우려와는 달리 도리어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겨 한국인의 진가와 저력을 내보이는 기회가 됐다.
정말 과거와 연결지어 보면 (정치권을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 믿지못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한국인들이다. 굉장하다고 밖에..할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