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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Jul 06. 2020

가장 쉽고 어려운 "에고 장난감" 내려놓기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나는 인간들의 많은 마음 고생 이유들을 '사회적 한계속에 매몰된 의식의 매트릭스 틀' 로 규정짓는다.


평생을 수련하고 별 노력을 다해도 에고의 욕망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휘둘리는 근본 이유가 스스로 세팅된 매트릭스의 틀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란 사실은 약간의 지성만 갖춰지면 바로 알아 차릴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에고는 그런 지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원숭이와 비슷한 수준의 지성을 지니고 있다. 즉, 자신을 고생 시키게끔 세팅해논 주인은 따로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속에서 휘둘린채 살아간다.


오지마 그만!! 일까?.. 얍!! 장풍을 쏘는걸까?.

걍아지나 고양이가 고기덩어리와 생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듯 인간의 에고가 가진 본능역시 마찬가지다.


에고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나약하고 핑계대기를 좋아하며 좌절하고 한탄놀이를 통해 위로받기를 원한다. 마음의 자리를 두고 에고가 꽉 차지해 놀아나는 감정들은 아주 단순하며 종류도 몇가지 패턴이 되지 않는다. 남보다 조금만 뒤쳐져도 열등감 아니면 조금만 앞서도 자만과 오만감을 내보이고 싶어하며 가질수록 교만해지는 특성을 보인다.


대부분의 신성은 에고가 자만감에 빠졌을때 보다는 좌절하고 실패했을때 위로와 용기의 형태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에고에겐 때론 무서운 몽둥이가 되서 찾아 오기도 한다.)


자신의 개인적 현실이 답답하고 한탄스러운 감정은 에고의 관점이다. 신성은 그것에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인내심을 가지게 만들며 긍정적 방향으로 바라보도록 응답한다. 마음의 자리를 두고 에고와 신성간의 밀고 당기기를 통해 어떤것이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살펴보면 지금 자신 마음속에 에고와 신성이 어느정도 비율로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밀당 하고 있는지 관찰해 볼수있다.


같은 현상을 보는 관점도 정 반대일 경우가 많다. 현상은 비극일지라도 부정적 생각이 주인이라면 그 마음은 에고에 함몰된 치유돼야 할 감정들이다.에고로 인해 한번 생성된 데이터는 저절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직 치유를 통해서 계속 발전하고 진화 or 퇴화해 나가는것이 '카르마'의 원칙이다.에고들은 '카르마' 의 노선에서 자유롭게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


신성의 입장에서 에고놀음은 언제든 조정이 가능한 놀이와 선택의 영역이다. 에고의 현실에 대한 투정과 한탄은 장난감을 원하는 어린아이의 유치함과 같음을 지켜볼수 있어야 한다. 장난감을 쥐어주고 더 놀게 하던지 이제 놀이는 그만! 시간 됐으니 깨어나라고 다부지게 말할수도 있다. 장난감을 빼앗으면 아이는 울지만 아이와 함께 노는 놀이라는 것을 아는 어른은 쉽게 수긍하고 장난감을 내려놓을줄 안다.


"너 내장 다 잘라내고 빈채 그냥 한번 살아봐"

".... 어쩔수 없네.. 그러지 뭐.....술 못먹겠네.. 아쉽..쩝...."


그런거다.


나의 경우는 지난날 에고의 한탄을 술맛을 좋게 하기 위한 안주 도구로 사용했지만 술을 끊었으므로 지금은 그다지 효용 가치가 없다. 


열가지 법도도 못지키는 원숭이들아 나 안해!니네  맘대로 살아라. 모세가 화나서 값비싼 석공예품인 십계를 내던지고 그랬단다.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을 안하고 생각을 안할수 있냐고 항변하는 에고에게 해주는 의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냥 안하면 되는거야'


궂이 찾아서 고민을 쟁겨 두어야 할것만 같은 강박관념 이라는 마음속 장난감을 놓아 버리면 되는 문제다. ( 쓸데없는 걱정속에서 우울증 자초해 끌어안엄마와 나의 반복되는 대화 레퍼토리다.)


설령 에고에겐 가장 큰 두려움 이라고 새겨진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에고가 결정하고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도망갈 이유도 일부러 끌어들일 이유도 없다. 주인에게 양심이 꿀릴게 없으면 죽음이 곁에 머물러도 당당해지고 친구가 될수 있다. 기적이나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 쉬운 길이지만 에고는 고양이가 생선을 앞에두고 단식투쟁 하는것만큼 어렵다고 느낀다.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서 에고가 뱉어내는 한탄과 투정들을 바라보면 알게된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그 마음은 에고의 장난감인 것이다. 아이인 에고에겐 큰 문제들도 어른인 신성입장에선 단순한 애들 장난일 뿐이란걸 깨닫는 순간 어른이 된다. 


어른은 아이들의 장난감에 대한 집착을 이해는 하지만 스스로 놀이에 빠져들고 싶어도 마음은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아이들 장난에 몰두하는 그것은 사랑스럽고 어린 무지한  -에고-  이다. 어른의 마음이 자연스럽고 익숙해 지면 비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돼서 살아갈수 있다. 


에고는 주로 사람들과 어울릴때와 무지를 가장한 편안함을 추구할때나 사용된다. 알아도 에고는 모르니까.. 모른다는 에고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다. '알고 싶지 않아 몰라'. 에고의 영역이 아닌 부분의 책임감에서 자유로운 에고가 할수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시대로 나아갈 인간들은 거대한 물살에 휘둘려 허우적 대는 무지한 어린 에고들의 난장판을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구  끝자락을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힌다. 휩쓸리지 말고 깨어 있으라..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다가온다.


*불교에서는 이런것을 '선정 바라밀' 이라고 한다.


Flávio Venturini - Minha Estrela:

https://youtu.be/u_O1SNWzK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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