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고 싶다
업무 상의 이유로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해외 연구원들이 한국을 방문한다길래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일. 해외에서 손님이 오시니 친히 셔틀까지 안내하라는 상사의 지시가 있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고, 연락처도 없는 사람들을 마중 나가는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마중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더라. 그저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춰 피켓을 들고 서있으면 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서 가방엔 책 한 권과 피켓만을 넣고서 버스에 올랐다.
해외 나가본 지가 언제였더라... 아마도 COVID-19이 전 세계를 뒤덮기 전 마지막으로 출국한 게 기억이 난다. 무려 4-5년 동안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으니 공항에 발 디딜 일은 더더욱 없었을 터. 인천공항 1터미널에 발을 디디니, 잠깐의 설렘이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공항만이 만들어 낸 향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풀잎을 떼며 봄을 기다리는 소녀의 마음같이 감정을 일렁이게 만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에 대한 설렘은 연말에 남은 연차를 털고서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문득, 그날의 그때의 기억을 새삼스레 불러일으켰다.
여행이 주는 선물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데서 찾아온다. 이게 여행을 가는 이유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던 두 사람이 각자 해외로 여행을 떠나 같은 날, 같은 시간, 한 장소에서 만났다는 것 자체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적이다. 내가 만약 그날에 떠나지 아니하였다면 만나지 못했을 운명이고, 그 시각 내가 추위를 피하려고 우연히 발견한 그 골목 작은 카페를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어디서 오셨어요?’
카페서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그녀가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햇살 같은 눈웃음에 얼어붙어있던 내 몸이 사르르 녹았다. 그 순간 설렌 내 마음을 혹여나 들킬 티 내지 않으려 동공을 떨림을 잡았고, 어깨를 으쓱 올리며 옷매무새도 정돈했다. 아니, 사실 조금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내가 잠깐동안 흔들렸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곤 사실 귀국한 이후에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녀는 잠깐 웃으며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서 귀여웠다고 하더라. 역시 마음은 숨기려고, 감추려고 할수록 더 티가 나는 법이다.
우린 그렇게 처음 만났다. 우연과도 같은 첫 만남에 서로를 운명이라 점찍었고 찰나의 순간 느꼈던 그 떨림과 울림은 지금도 내 맘속에 타투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각자 다른 삶을 지내다 어떤 연유로 이곳으로 떠나왔고, 대화를 통해 서로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 믿었고, 서로의 아픔을 안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철없고 철석같은 어린 날의 믿음은 내 모든 환상통의 밑그림이 되었다.
나는 여행을 시작할 때의 설렘만큼 운명이라 믿은 우리가 영원이란 것을 지켜낼 줄 알았지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출국할 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행이 결국 막을 내린 것처럼 너와의 헤어짐이 우리 사이를 마무리하는 커튼콜이 되었다. 그때 여행은 나에게 너라는 우주를 선물했지만, 네가 떠나갔던 그때의 난 우주만큼 공허함을 느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이지만 사실 나는 그때의 우리가 그립다. 현실로 돌아와서 이별 후에 그렇게 아팠고, 그렇게 우주만큼 공허했는데 왜 자꾸만 다시 아프고 싶어 할까.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는지. 적어도 사랑할 땐 행복했으니까. 그래서 이번 연말,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좋으니 나는 다시 한번 여행길에 오르려고 한다. 지금 내가 인천공항에서 느낀 감정은 그렇다. 다시 한번 그때의 어리고 순수했던 우리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