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나를 마주할 때

사랑이라는 이유로

by 예민

나는 스스로 단단하다고 여겼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자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하질 않았고,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 기훈이 형처럼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탓에 인생을 걸으며 넘어지기를 수십 번, 수백 번을 더했다. 그래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다시 일어나는 힘은 타고났는지 인생에서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몸소 깨달으며 체득한 지혜가 내 머릿속의 지식보다 많다고 착각했다. 20대를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며 살았는데 30대는 더욱 단단해진 내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생각.


이번에 내가 부서져버린 이유는 고작 사랑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연애를 적게도, 그렇다고 많게도 하진 않았지만 남들 하는 만큼은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고작 사랑 하나 때문에 더 이상 무너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하면서 인생이란 구름 위를 걷기도, 밑바닥도 기어보기도 여러 번. 사랑쯤이야 여러 번 경험했고 알만큼 알았다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30대가 되어서 고작 사랑이 이토록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지도 몰랐고, 하루 온종일 내 머릿속이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맴돌지도 몰랐다. 내가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그 사람은 깜빡이도 없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완전히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서 한 줌 미련 없이 떠났다. 세상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없다. 사실 이젠 사랑하다 다치는 게 싫어 여러 겹의 이불을 둘러싸고 있던 난데, 그 방패들을 다 뚫고 들어와 책임지지도 못할 마음을 혼자 다 만들어놓았으면서, 다시 사람한테 기대하게 만들어놓고서. 결국 끝에 가서야 비겁하게 자기는 진심으로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호구가 되었다.


떠나간 사람이야 괜찮겠지만,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 사랑을 치워야 한다.


이토록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오랜만이다. '그깟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는 게 뭐 얼마나 힘든 일이냐' 욕해도 할 말 없다. 과거에 나 역시 내 친구가 여자 하나 때문에 질질 짜고 있으면 술 한잔 사주면서도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의 내가 겸손하지 못했든 꼴값을 떨었든, 결국 나는 이 자리에 홀로 남아 사랑이 스치고 간 자리를 치워야만 했다. 대체 사랑의 부산물은 왜 이렇게 많은지. 치울 엄두조차 나질 않아 한참을 멍하니 우두커니 앉아 깨진 조각들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앉아 멍하니 사랑이 스치고 간 자리를 지켜보니, 제일 크게 조각난 한 가지가 눈에 밟혔다. 그건 바로 '잃어버린 나'. 문득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 시간들 속에 정작 '나'란 존재는 없었다. 항상 마음의 안정과 침착함을 추구하던 나였는데, 전혀 차분하거나 침착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했고 되게 스스로 감정적이게 되거나 격양된 모습을 보였다. 인생의 영점이 내가 아닌 그녀에게 맞춰졌다. 쉽게 말해, 그녀에게 목줄이 채워진 채로 끌려다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인정한다. 내 목줄은 스스로 내가 채웠더라.


철석같이 또 믿었고 그녀를 나의 운명이라 여긴 나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저녁이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한 탓에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아무런 이유 없이 심장이 뜀박질을 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가 너무 미워질 때도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해주지 못하고 온전히 나를 그녀에게 끼워 맞춘 탓이다. 나를 먼저 사랑해 주면서 그녀를 사랑했어야 했는데. 나를 애써 지우고 그녀를 마주했으니. 사실 이 글 역시, 어떻게든 하나를 써서 올려야 '내 지금의 상태가 괜찮아지겠다'라는 생각이 강해서 쓰고 있다. 이렇게나마 내 감정들을 마주하고 정리해야 사랑이 스치고 간 자리를 깨끗이 치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리고 다시 펜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긴 시간을 함께 했던 것도 아니고,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한 건 아니지만 이번처럼 사랑을 하며 크게 무너져 내린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한 동안을 최면에 걸린 것 마냥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한 채 감정이란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태풍처럼 짧고 강렬하게 지나쳐갔다는 것. 시간이 정말 소중해진 30대가 되다 보니 치즈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 그래도 지금은 회복단계에 접어들었다. 당분간을 나를 찾기 위한 시간으로 온전히 소비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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