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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 Sep 22. 2024

이 비가 그치고 난 뒤

올해 여름. 계절같이 뜨거웠던 고난의 기록들.

더위가 사람 여럿 잡았던 올해 여름.


만약 먼 미래에 [응답하라 2024] 시리즈가 미래에 나온다면 올해 여름은 필수 에피소드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역대급 더위였고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점은 너무 길고도 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기상학자들이 예측하기로, 앞으로 우리가 겪을 여름 중 올해가 제일 시원했던 여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앞으로 겪을 여름 중, 올 해가 제일 시원할 예정이라면 매년 5월에는 피난 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것도 최대한 극지방과 가깝게.


기대했던 처서매직은 없었다. 처서 이후 잠깐이나마 시원해지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하늘은 인간을 조롱하듯 더위를 제자리로 원위치 시켜놓았다. 우리 선조들은 농사일을 하기 위해 태양의 움직임을 통해 1년을 24절기로 나눴다. 그중 처서가 더위의 끝자락이라 생각했지만, 선조들의 지혜 또한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옛 말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래에는 기후와 관계없이 온실 안에서 작물들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 테니 절기는 역사 속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괜찮으려나.


그대들은 여름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꽃. '능소화'를 알고 계신지요. '업신여길 능', '하늘소'자를 써서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이유인즉슨, 이 꽃의 개화시기는 무려 8월이다. 그 극악무도한 태풍과 모든 꽃들을 말려버릴 듯한 더위가 기승부리는 시기. 하지만 능소화는 이런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여러 악조건 속 결국 보란 듯이 만개하고 만다. 진흙 속에서 피는 꽃과는 다른 느낌의 '멋'이다. 그리고 이 꽃의 쿨한 점은 잔인했던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때서야 한 줌 미련 없이 떨어진다. '이 땅 위에서 나는 나를 보여줬으니, 이만 물러간다.'


올해 여름은 나에게 여러 시련을 안겨주었다. 사적으론 연인과의 이별을 경험했고, 회사에서는 직장 상사와 큰 갈등이 있었다. 그놈은 어느 직장에나 존재하고 모든 동료들이 인정하는 미친놈 중 하나. 나는 회사에서 사람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건 참을 수 있어도, 사람이 덜 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서 피해받는 직장동료가 너무나도 많았고, 그 밑에서 이유 없이 욕을 먹으며 일하기 부지기수.


상사 같지도,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 비위 맞추면 살 바엔 퇴사할 각오로 시원하게 할 말 하고 나오자 싶었다. 나 역시 부하직원으로서 상사에게 대든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싸웠다. 능소화처럼 피어나고 싶었다.


그 결과 올해 7월. 인사발령이 났다.


예민 연구원, OOOO팀으로

부서이동을 명함.


권력의 힘이 작용을 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그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1년 동안 몸 담았던 팀을 떠나야 했고, 새로운 팀에서 다시 둥지를 틀어야만 했다. 그 악명 높은 상사와는 더 이상 일적으로 부딪힐 일은 없었기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전에 함께 일해던 팀장과 팀원들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라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새로운 부서에 있는 팀장 또한 만만치 않은 빌런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내 운명인 것을.


한 여름 무더위처럼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면 항상 머릿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다. 글에서도 느껴질진 모르겠지만 본래 가진 게 '자신감'(이라 쓰고 '허세'라 부른다)밖에 없는 탓에 영화 [신세계]에서 황정민이 연기했던 '정청'의 명대사. "드루와, 드루와" 를 속으로 되뇐다. 겉으로는 온갖 폼이란 폼은 다잡고, 힘듦이 계속되면 이내 무릎 꿇고 만다. 나는 능소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보다 긍정적인게 무릎 꿇은 상황에 처해도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떠올린다. 인생의 위기는 또 헤쳐나가는 맛이 있으니까. 인생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본값으로 설정해 놓은 뒤부턴,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먼저 쿨한 척 악수를 건넨다.


'위기, 어서 오시고' 


올해 여름 이별이야기. 사실 헤어진 시기는 사오월쯤이라 봄이라 보아야 맞겠지만 이별엔 매뉴얼이 없기에 그 과정이 생각보다 길었다. 그렇기에 초여름까지 이별은 진행 중이었다. 생각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어느 날, 생각 없이 인스타를 쳐다보다 '두 번째 이별을 맞이했을 때 사람은 진짜 이별을 마주한다.'라고 적어진 글귀를 보았다. 두 번째 이별이라 함은, 전 애인에게 새로운 누군가가 그 옆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글을 보고 난 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우연히 그녀 옆에 누군가 자리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안을 깊게 들여다보니 내 마음은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이별 이야기를 모두 적게 된다면 올여름의 기록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우선은 이만 줄인다.


9.21. 토요일 오후

창밖에는 추적추적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한 달 만에 내리는 비. 처서 때 비가 내린 이후로 잠깐의 국지성 호우를 제외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비가 내린 적은 처음이다. 담배를 태우러 밖엘 나가니 바람이 벌써부터 시리다. 과연 이번에야말로 이 비가 그치면서 늦은 여름도 함께 데려갈까. 그러곤 하루빨리 가을을 우리 집 문 앞에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겨울도 먼발치서 따라오고 있다는 증거니까. 유난히도 길고 길었던 여름날의 기록은 이렇게 마무리되길.


이 비가 그치고 난 뒤, 내 옆에도 새로운 사람이 내 옆자리를 채워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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