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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아씨 Nov 02. 2021

그 이상의 가족


지금껏 널 보호한다 여겼던 내가 법적으로 그럴 수 없는 존재임을 뼛속 깊이 되새기게 된 건 3년도 더 된 어느 날였다.


엄마가 쓰던 번호를 네가 이어받아 쓰면서 네 휴대폰 명의는 줄곧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너는 본인이법적 보호자인 아빠 명의 핸드폰으로 인증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늘 곤란해하곤 했었다. 그렇다 해도 너, 나, 아빠 모두 네 명의의 새 번호로 개통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마도 저마다 엄마의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아 했던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아직도 내겐 '엄마♡'로 저장되어있던 그 번호가 '엄마♡OO(너의 이름)'으로 저장될 만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이름이기에.


하지만 네가 크며 휴대폰 인증으로 처리할 일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고, 우린 동네 작은 통신사 직영점에 들러 명의 변경을 신청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피해의식인지 열등감인지 트라우마인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평생 가지고 있었던 평범하지 않은 가족 관계를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심장이 쿵쾅거리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너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법적으로 너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엄마는 내 친가가 비교적 부유하므로 혹시나 먼 훗날 나에게 득이 될 수 있으니, 이혼 후에도 재혼해서도 내 성(姓)을 바꾸지 않았고 나 역시 사춘기 무렵에 굳이 새아버지의 성으로 바꾸고 싶진 않았었다. 그리하여 엄마가 재혼을 했을 땐, 나는 엄마의 딸이지만 친아버지의 가족관계 증명서에만 나올 뿐, 엄마의 새로운 가정에서는 너와도 아빠와도 법적인 가족이 아니었다. 심지어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나는 세대주인 아빠의 '동거인'으로 기재되어 있어 더 비참한 기분만 들었었다.


그래도 엄마가 살아계실 땐 엄마를 매개체로 가족 관계를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나와 네가, 우리가 가족이란 걸 증명하기엔 너무나 복잡한 설명과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다. 그걸 네 휴대폰 명의변경을 하는 순간에 타인의 얼굴에서 읽은 당혹감과 그걸 백만 배는 더 부풀려 받아들이며 요동쳐대던 내 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 나는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그락불그락한 표정과 널 배려하지 못한 언행들로 다 뿜어내고야 말았었다. 직원이 '이걸로는 가족 간 명의변경이 어렵다'하여 아무 성과 없이 돌아 나와, 너는 본가로 나는 나의 집으로 향했고, 가슴이 죄여오는 듯한 심정으로 지하철 밖을 바라보다 받은 너의 카톡에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고 언니가 안 힘들었겠지.' 라며 시작했던 너의 장문의 문자는 내가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너에게 또 어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지 깨닫게 했고, 나 스스로도 대체 왜 그랬는지 내 안의 억눌린 감정들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다.


친한 친구와 지인은 알고 있지만 굳이 남에게 알리지 않는 나의 가장 큰 비밀이자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모든 가족사가 나는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학교 생활기록부와 회사 입사지원서에도 결혼식과 청첩장에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부 OOO과 모 OOO의 딸 OOO'로 적힐 수 없고, 이제는 회사 가족 건강검진이나 경조사에 너와 아빠를 올리기 어려우며, 깊은 연인 관계에서도 내 가정사를 무거운 마음으로 얘기했던  분명한 사실이기에, 성이 다른 아빠와 동생 그리고 엄마의 부재까지, 내 가족사는 굳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가장 깊숙이 숨겨둔 상자였다.

그 상자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 앞에서 열어야 하는 그 심정을 네가 속속들이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가 힘들어하지 않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너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내 상처 안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던 그 상태에서 벗어나, 네게 내 상자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며 내 감정이 요동쳤던 건 너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랬고 미안함에 거듭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나보다 성숙하게 내 상처를 바라봤던 걸까. 너는 시간이 걸렸지만 내 마음을 받아줬고 그 후 다시 찾은 (그때와 다른) 통신사 직영점에서 별 무리 없이 명의변경을 했다. 너와 웃으며 연하게 명의변경을 할 수 있었던 그때, 어쩌면 나는 내밀한 곳에 숨겼던 상자를 조금은 더 밝은 곳으로 옮겨둔, 한결 가벼워진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네가 내 옆에서 나의 둘도 없는 가족으로서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날 보듬어주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우리는 여전히 법적인 가족관계는 아니지만, 그 존재 이상의 가족으로 남아있다. 한동안 뜸했지만 네가 어릴 때부터 너와 함께 다니면 '어머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너와 나는 닮아 있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속속들이 많은 걸 알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법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내가 널 보호한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라는 걸 네가 꼭 알아주길 바란다.


너는 엄마가 내게 남긴 하나뿐인 인생의 선물이란 것을.


* <오롯이 널 사랑하기까지>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언니의 글을 읽고 동생이 직접 그린 아주 소중한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불펌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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