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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아씨 Oct 11. 2021

아깝지 않은

14살 나이차 덕분에 나는 네게 아낌없는 물질적 지원을 할 수 있었다.

속 깊은 네가 많은 걸 바라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들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네게 뭐라도 사줄 수 있는 돈을 벌고 있다는 건, 욕이 나오고 온 몸에 진이 빠지는 와중에서도 회사를 다니게 되는 큰 동기가 된다.

(진 빠지는 회사생활에 지칠 때면 "난 속세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수녀가 되었어야 해. 그랬으면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아" 하며 작은 이모 뒷목 잡는 소리를 해대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네가 입시 미술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빠가 네 학원비를 책임지셨으나, 그 외 학업이나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필요한 미술 용품, 태블릿, 노트북 등 갖은 지원은 주로 내 몫이었다. 예전부터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당연히 내가 사곤 했으니, 따로 살고 있는 지금도 화장솜부터 각종 화장품까지 네게도 필요한 생활용품은 내 걸 살 때 네 몫까지 더해 사고 있다. 아마 내가 거지가 되지 않는 한 이 소비패턴은 그대로 유지될 듯싶다.


이 마음을 알아주는 건지 언젠가부터 너는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구입하고, 사고 싶은 옷이나 신발은 찜해두었다가 대폭 할인에 중복 쿠폰, 포인트를 최대로 쓸 수 있을 때 사는 등 나보다 훨씬 알뜰하게 소비한다. 그러다 보니 묻지도 않고 네 것을 사던 때와 달리 이제는 필요한지 물어보고 사긴 하나, 아직도 여전히 네 것까지 더해 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너 몰래 사서 쟁여두고 있어, 이 큰손 고질병은 버리지 못하는 중이다.


한 번은 일본에 출장 가서 대형서점에 들렀을 때, 내건 안 사고 네 필통을 사는 내게 같이 있던 팀장님이 “동생 것 좀 그만 사고 네 거 사” 라며 한 소리 하셨었다. 그만큼 나와 많은 시간을 나눈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어딜 가든 네게 사줄게 보이고 맛있는 걸 먹으면 널 데려가고 싶은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알아챈다. 그래서인가. 너와 있을  보고, 먹고, 누리는 것들이 가장 온전하게 느껴지므로, 내 여행 메이트 1순위는 언제나 너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해타산이 뇌에 장착되어 태어난 것 같은 나는 너와 첫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내가 모든 경비를 냈으니 여행 계획을 혼자 세우라” 며 널 닦달해 놓곤 여행지에서 “동선이 너무 복잡하고 길다. 이렇게 어떻게 다니냐, 다시 짜라” 며 온갖 타박을 주어 널 힘들게 만들었었다. 돈이 없던 인턴 시절에는 조조영화를 보느라 잠을 설치고 나와 뾰로통한 얼굴로 걷고 있는 네게 온갖 짜증을 내면서 “너 영화 보여주려고 잠도 못 자고 가는데 쨍쨍 대지 마” 라며 혼내기도 했다. 


그렇게 말끝마다 “언니가 사줬으니까 / 언니가 돈 냈으니까” 라며 널 위한답시고 했던 것에 대해 따박따박 읊어가며 대접받으려던 내 고약한 심보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지금은 당연히 해야 할 내 몫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건 상대를 향해 내 마음 전부를 내어줄 수 있다는 의미란 걸 깨달은 큰 변화였다.


나는 물질뿐만 아니라 너에게 쏟는 시간 역시 아깝지 않다. “언니 쉬는 날인데 힘들어서 어떡해” 라며 내 눈치를 보는 네가 서운할 정도로, 나는 네가 과제를 도와 달라며 우리 집에 올 때 무척이나 반갑고 즐거웠다. 네 과제를 도우며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성장한 네 모습을 보는 건 내겐 하나의 기쁨이었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각기 다른 배경에서 손짓과 몸동작으로 의성어/의태어를 표현하는 사진 과제를 할 때는 어쩜 그리 창의적으로 잘 표현하는지 기특했고, 2년 넘게 살면서도 잘 몰랐던 이 동네를 구석구석 너와 함께 다니며 더 좋아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는 네가 그리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보며 뚝딱뚝딱 잘 그려 신기하기도 하고, 오리면서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했으며, 음악을 입혀 완성된 영상을 보여줬을 때는 네가 힘들지만 좋아하는 미술을 하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네가 과제 결과물을 공유해주며 교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얘기할 때는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하기도 했다.


마음, 물질, 시간은 나 자신이 여유 있을 때 남에게 베풀기 마련이다.

어쩌면 풍족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안정되게 생활하고 있음에 네게 그 여유를 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내가 여유를 잃어 네게 주는 게 부족해지더라도, 너를 위한 내 마음만은 그렇지 않음을 알아주길. 나아가 네게 아낌없이 주는 나일 수 있게 더 풍족한 내가 되길 바라본다.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나에겐 행복한 순간임을 네가 마음 깊이 느껴주길 바라는 나이다.


* <오롯이 널 사랑하기까지>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언니의 글을 읽고 동생이 직접 그린 아주 소중한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불펌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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