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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Dec 02. 2019

우울감은 그 틈에서 자란다



1.

나는 언제, 왜 우울감이 들까 생각했다. 언제냐고 하면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고, 왜냐고 하면 '나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는 것들에 틈이 생겼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나를 견고하게 이루는 것들이 무엇이냐고 하면 일기 쓰기, 라디오 듣기, 책 읽기, 글 쓰기라 할 수 있다. 균일의 주범은 주로 일기 쓰기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 중 비중이 가장 큰 놈이다. 일기가 밀린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마음에 경보등이 요란하게 울린다. 가던 길을 멈추고 마음을 들여다볼 때라며, 세상에 치이지 않도록 경고하는 경고음이 울린다. 가벼운 우울감을 넘어 회의감을 느끼는 단계에 접어들면 지난 일기를 읽는다. 내 머리맡엔 매일 밤 업그레이드되는 특효약이 놓여있다.




2.

요 며칠 마음이 편치 않다. 내 몸이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내 몸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며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예정에 없던 기다리는 일이 끼어들면서 꿈에 가까웠던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니 내가 계획했던 일들의 본질을 자꾸 까먹는다. 현실에 순응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본질을 찾아 나서기 위해 다시 책을 집어 든다.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글을 쓴다. 기다리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그 일은 잠시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밀린 일기를 쓰며 일상을 하나씩 되찾는다.




3.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일주일 전 도서관에서 대여한 은유의 <쓰기의 말들>이다. 책을 빌린 날 약속 장소에 1시간 일찍 도착해 읽었다. 흡입력이 강해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아쉬운 마음에 페이지를 조금 남겨뒀는데, 잠시 잊고 지내다 다시 꺼내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마저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몸과 마음에 온기가 스미는 느낌이었다. 나를 다시 삶에 궤도에 안착시켜 놓은 것 같은. 트랙 밖에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었는데 다시 고개를 들게 한 느낌.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출발선에 서는 것까지 성공한 것 같다.




4.

우울감이 조금씩 가신다. 쓴다는 건 마음 깊은 곳에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다. 읽는다는 건 어떤 실타래가 엉켜있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는 일이다. 이 명제 앞에서 실타래의 굵기와 길이, 종류는 중요치 않다. 도저히 풀기 힘들어 보이는 얇디얇은 재봉실 같은 고민거리들도 시간을 들여 글로 풀어내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보인다. 글로 풀고 글로 위로받는 습관이라. 이보다 더 좋은 습관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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