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듣던 습관은 쉽게 못 버리겠다. 한국에서 온 사람 아니랄까 봐. 정 떼는 게 쉽지 않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 10년 이상 쌓아왔으니 오죽할까.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일력을 뜯고 글귀를 따라 읽은 뒤 블루투스 스피커를 켠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한국 라디오나 가끔은 덴마크 라디오를 듣기도 한다.
음악과 달리 라디오는 쌍방향 소통이다. 소통을 하니 자연스레 정이 쌓일 수밖에. 비록 이곳에서는 짧은 문자는 50원, 긴 문자나 사진을 첨부하면 100원인 사연을 #8000번으로 보낼 수 없지만 여전히 세상 사는 이야기는 공짜로 들을 수 있다. 휴대전화 뒷번호 4자리 외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누군가의 사연에, DJ의 위로 섞인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다. 혼자여도 같이 있는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공감으로 예열된 마음은 꽤 많은 것을 용서한다. 작은 실수와 체념, 곤두선 신경과 우울감 그 어떤 것들도 예열된 마음 앞에서 스르르 녹아버린다.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날이 반복되면 우울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라디오는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곳에 와 조금 달라진 건 미국 라디오가 추가됐다는 점이다.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며 미국 라디오 앱을 다운로드했다. 재생 속도가 가장 뛰어난 시카고 라디오를 아침마다 듣는데, 스피커를 크게 켜놓고 샤워를 하면 외국인 룸메이트와 같이 사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좋다.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는 Pandemic과 COVID 19이지만 가끔 미국에서 치킨집을 창업한 한국인의 인터뷰나 연예인 인터뷰도 들려(오는 것 같아) 재밌게 듣고 있다. 정 쌓기는 힘들다. 오고 가는 게 있어야 정이 쌓이는데 미국 라디오는 아직 나에게 매우 일방적이면서도 폭격기 수준의 방대한 알파벳을 퍼붓는 해독하기 쉽지 않은 암호처럼 느껴지기 때문. 귀가 트여야 정도 생기고 할 것 같다.
매일은 아니고 아주 가끔, 하루를 열심히 보낸 대가로 한국 라디오를 켠다. 의아하게도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 한국은 밤 10시다. 밤 10시엔 가장 좋아하는 '푸른 밤, 옥상달빛입니다', 이어 12시부터는 '음악의 숲 정승환입니다'가 한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는 마음의 온도가 가장 적정해지는 시간대였다. 듣다 보면 해외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며, 한국은 밤이겠지만 이곳은 아침이라며 사연을 보내는 사람이 꽤 많았다. DJ는 타지에서 외롭고 힘들겠다며 말 끝엔 다 잘될 거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일기를 쓰다가 잠시 펜을 내려놓고 그들처럼 사연을 보내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옥 디스크, 달 자키자키 언니들 안녕하세요. 저는 덴마크로 워킹홀리데이를 와있는 29살 여자입니다. 영어 공부를 끝내고 저녁 준비를 하려고 라디오를 켰어요. 여기는 오후 4시예요. 주 37시간 일하는 덴마크에서는 보통 오후 4시에 퇴근을 해요.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지만 저도 그 시간만 되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여가 시간을 보내야 될 것 같고 그래요. 그래서 언니들 목소리를 들으며 요리를 해요. 덴마크가 살인적인 물가라고 하지만 마트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저렴해서 한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거든요. 김치나 조미료도 아시안 마켓에 팔고요!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꼭 한국에서 잠들 준비를 하며 듣던 기분이랑 비슷하거든요. 딱히 고민은 없었는데 최근에 생겼어요. 덴마크에서도 확진자 수가 늘면서 모든 공공시설과 교육시설을 2주간 폐쇄하겠다고 이틀 전에 발표했어요. 사기업에도 협조를 요청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는데 제가 팔로우하고 있던 식당과 카페에서 하나둘 2주간 영업을 중단한다는 게시물을 올리고 있네요. 이력서를 완성하고 어제부터 지원을 하려고 했는데 허탈해서 웃음만 나와요. 마냥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네요. 이 또한 지나가겠죠?"
상상이 현실이 됐으니 사연을 보낸다면 이런 내용으로 보내지 않을까. 사실 발표 이후 좌절하지 않기 위해, 쉽게 지치지 않기 위해 방법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사연에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만 듬뿍 담아 보낼 것 같다. 어찌되든 다 잘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