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를 직접 해 본 적은 없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건 알았다. 들어가는 고명만 몇 개인가. 괜히 잔치 음식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지.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잡채는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는 듯 보였다. 아시안 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당면과 간장 등 한국 양념. 거기에 현지 마트에 널리고 널린 각종 야채들을 넣고 버무리기만 하면 그립고 그리운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한국인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지. 각종 양념장과 야채는 집에 있어 아시안 마켓에서 대용량 당면을 사 온 뒤 작업에 착수했다.
냉장고에서 놀고 있는 당근, 양파, 버섯 등 각종 야채를 먹기 좋게 손질하고 참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다진 마늘 한 숟갈을 넣고 볶는다. 제일 중요한 당면은 내가 먹고 싶은 만큼 잔뜩 집어 불려 놓는다. 명절마다 먹을 수 있는 엄마표 잡채에는 당면보다 야채가 더 많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매번 채소를 많이 먹으라며 잔소리하는 엄마이기에)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상을 차려 놓으면 다섯 개의 젓가락이 엄마표 잡채로 돌진한다. 다들 당면만 쏙쏙 골라 먹는 건 지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쯤이면 야채만 남아있다. 혼자 만드는 잡채는 다르다. 취향껏 비율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겠다.
당면까지 완전히 삶아지면 양재기 같은 큰 샐러드 보울에 펄펄 김이 나는 당면과 고명들을 쏟아붓는다. 장비는 고무장갑과 비닐장갑 하나면 충분하다. 뜨겁지 않겠냐는 어리석은 걱정에 회심의 미소를 한 번 날려 주고는 보란 듯이 휘릭 휘리릭 버무린다. "간장!" 하면 엄마 손에 쪼르륵 간장을 붓고, "그만!' 하는 말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해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제는 내가 고무장갑 낀 손을 오므리고는 카리스마 있게 "간장!" 했다가 "그만!" 했다가 "참기름!" 했다가 "더더더" 한다. 보고 배운 게 무섭다. '타지에서 생존하기'를 하다 보면 나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깜짝깜짝 놀란다.
카리스마까지 첨가된 잡채가 완성됐다. 당면으로 가득한 잡채를 보니 흐뭇하기까지 하다. 식탁에 예쁘게 차려놓고 수저를 든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제야 느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은 더 지나있다. 엄마표 잡채를 떠올린다. 그 많은 재료를 하나하나 씻고, 다듬고, 썰고, 버무리던 엄마의 손이 그려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감사해지는 순간을 자주 맞닥뜨린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른다. 괜히 엄마가 또 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