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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May 21. 2020

10 워홀에도 369의 고비가 있을 줄이야


워킹홀리데이를 향한 낭만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워낙 오래전부터 품어 온 꿈에 가까운 계획이었기에, 품는 기간 동안 환상은 날로 부풀었다.


항상 시작은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가면'이었다. 왜 그렇게 새 출발을 꿈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가면 온갖 시선에 움츠러들었던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보면 없던 용기도 불쑥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면 '새로운 모습의 나'가 나를 영어 공부하게 만들 것이며, 어느 순간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 둘러 쌓인 내 모습이 짠 하고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짠 하고 나타난 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깊은 우울감이었다. 


흔히 말하는 369의 고비는 회사 다닐 때나 있는 줄 알았다. (보통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3개월 차를 시작으로 3개월에 한 번씩 퇴사 욕구 및 자아 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고 해 369의 고비라고 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3개월이 3주가 되고 3시간이 되고 3분, 3초까지 줄어들 수도 있는 게 함정.) 아무튼, 회사 다닐 때나 적용되는 줄 알았던 369의 고비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해당되는 필수 옵션이었다. 가끔 하루 종일 한국 뉴스와 덴마크 뉴스만 번갈아 확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면, 내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 기분이 다운되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를 때려치우듯 뭔가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진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고비, 3개월 차는 달랐다.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안 되면 다시 다르게 해 보고. 어떤 위기가 와도 내가 예상할 수 있고 손 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척척 해오던 나인데.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무뎌져야만 하는 건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머릿속이 복잡해져 하나씩 쳐내가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깜깜하기만 했다.


입맛도 없고 요리에 흥미도 떨어졌다. 글도 쓰지 않았고 일기도 밀렸다. 매일 기록하던 메모장도 텅텅 비었다. 책도 읽지 않았다. 책과 글을 멀리해 우울해진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매번 헷갈리지만 결론은 그랬다. 예전처럼 어디든 새로운 곳에 다녀오면 기분이 나아졌으려나. 새로운 곳에 와서 이러니 참 막막했다.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잘 마시지도 않는 위스키를 한잔 가득 따랐다. 어떻게든 기분 전환을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손을 놓았다. 시간이 약이겠거니 하고 발버둥 치기를 포기했다. 시간을 따라 우울감도 흘러갔는지 고요함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많이 소란스러웠나 보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는 잠재우려 발버둥 치기보다 고요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듯싶다. 어디에 있든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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