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 온 지 네 달, 내 자전거가 생겼다
친구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같이 사는 사람이 자는 틈을 타 한창 책을 읽던 중이라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신기하게 생긴 이모를 쳐다보는 까만 눈망울이 화면에 비쳤다.
공강 시간에 편의점에서 만나 불닭볶음면에 스트링 치즈 찢어 삼각김밥까지 말아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한 명은 엄마가 됐고 한 명은 덴마크 이모가 됐다. 이 나이가 됐는데도 아직 내 친구가 애엄마라는 게 믿기질 않는다. 꼭 교양 수업 과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둘 다 집에만 있는 처지가 같아서인지 꽤 자주 전화가 걸려오고 받을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 번은 안부를 주고받는데, 본인 얼굴 보여줄 생각은 안 하고 아기 얼굴만 보여주던 친구가 그래서 요즘 덴마크 상황은 어떠냐며 뭐하고 지내냐 물었다. 날 보며 웃어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아기 얼굴을 보며 나 요즘 자전거 타면서 지내! 하고 해맑게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살짝 스쳐 지나갔다)
태어나서 자전거를 타본 적은 딱 세 번이다. 첫 자전거는 초등학교 때였다. 소풍 가서 자전거를 탈 거라는 선생님 말에 나만 두 발 자전거를 못 타는 친구일까 봐, 놀림받을까 무서워 무릎 까져가며 언니에게 스파르타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후로 자전거를 단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 기억 그대로 대학교 1학년 때, 상경을 했으면 한강에서 자전거 한번 타야 된다며 친구 손에 이끌려 탄 게 두 번째였고, 내 인생에 자전거는 두 번 다신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세 번째 기억이 존재하는 건 다른 친구의 꼬드김에 다짐이 무너졌기 때문. 서울과 달리 한적한 친구 고향집에 놀러 가 자전거를 1시간 빌려 탔다. 다행히도 두려운 상황은 없었지만 재미보다 고통이 더 컸다.
이런 내가 근황이 뭐냐는 질문에 당당히 자전거 타기라고 말하는 건 기적이 아니면 뭘까. 나 이제 자전거 탈 줄 안다고 하니 친구들은 물개 박수를 쳤고, 한국에 오면 따릉이 타러 가자는 제안이 물밀듯 밀려왔다. 거기에 최근 대여한 '내 자전거' 사진을 보내니 관심과 애정 그리고 질문이 쇄도했다. 이제 막 한걸음 겨우 뗀 아기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지만 어깨가 으쓱했다.
사실 질문은 자전거를 빌릴 때부터 끊이질 않았다. 신청서 작성할 때 코멘트에 신신당부를 했다. 엄청난 초보자이며 절대 높지 않은(불안정해서 사고 나지 않을) 나에게 맞는 적당한 크기의 자전거를 받으면 좋겠다고. 말을 아껴야 했는데. 다음날, 확인 전화가 오더니 내 코멘트에 대한 폭풍 설명이 이어졌고 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덴마크에 와서 한 나의 첫 통화는 엄청난 현타를 안겨줬다.
그날 우울 구렁텅이 직전까지 갔다가 우울감보다 영어 늪으로 빠지는 쪽을 택했다. 잠시 손을 놓았던(왜 놓았었는지는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 공부 계획을 재정비하고, 무작정 듣고 무작정 따라 말하며 유선 상에서 입도 뻥끗하지 못했던 한을 풀었다.
워킹홀리데이를 꿈꿨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도전'이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일생일대의 큰 도전까진 아니지만 충분히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크고 작은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도, 재취업도, 스펙 쌓기도 아닌 그 이외의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이 상황이 여전히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작고 소중한 이 시간들이 내 삶 곳곳에, 어쩌면 깊고 깊은 곳까지 닿아 진하게 물들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