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 삶에 묻어 버린 냄새가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
"사라졌다."
내 살과 삶을 둘러싼 공기 속에 은은하게 남아 있던 '잔향'이 사라졌다. 인식하고 맡으려 해 봐도 이젠 맡아지지 않는다. 크게 숨을 쉬고 내뱉을 때 느껴졌던 코끝에 남은 내음조차 느낄 수 없다. 봄이 봄내음을 남기고 가듯, 사람도 잠시 머물던 곳에 잔향을 남기고 지나가는데, 그게 참 독하게 진하더라.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은 함께 둘러싸고 있던 공기 속으로 퍼져 버린 흔적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 의도치 않게 그가 머물 곳을 내어주게 된 거다.
첫 만남에 그렇게 향을 인식했고, 두 번째 만남에선 내음을 남겼고, 향의 깊이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을 땐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AM 6:27)
촉촉하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살 위로 차게 가라앉는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보통 크기의 원룸. 혼자 눕기엔 공허하고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싱글 침대. 허한 공백을 메우고 있는 각종 인형과 베개. 그 속에 파묻혀 있는 나.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발로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것. 시원하고 통쾌하다. 새벽에 머물렀던 잔향이 흘러 나가는 시간만큼은 시원하게 숨을 내쉬어 본다. 새벽 동안 무거웠으니 가볍게 나가줄 법도 하지. 유난히 정체되어 있던 오늘 새벽. 내 공간을 쓸데없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잔향이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너무 신경 썼나, 꿈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눈 대화였는데 할 말만 하고 가더니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던데. 여전히 이기적이야.
(AM 8:10)
문을 닫고 나가려는 데, 지독하게 남아 있는 냄새에 오늘도 코가 찡그려진다. 향수를 막 뿌려 봤다. 새벽을 위해서. 내 공간, 공기에 뭐 이리 많이 남기고 갔을까. 혼자 기다려 본다. 빠질 때까지.
(PM 12:32)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동기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향수 쓰냐고. 선물 받은 건데. 이름을 몰라 열심히 검색해서 알려줬다. 작은 공병에 조금 덜어 다녔던 터라 살짝 뿌려주니 아주 좋아하더라. 식사가 끝나고 담배 한 대 피우려 불을 붙이는 데, 동기가 연애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사람냄새 때문에 미쳐 본 적 있느냐고. 웃음도 안 나왔다. 최근 만난 연인의 살 냄새가 그렇게 좋단다. 품에 안기면 그 사람 냄새 때문에 그렇게 잠이 잘 온다고. 이불과 베개에 남은 그의 잔향도 좋다고 이게 찐 사랑이냐며 호들갑이다.
"좋을 때네" 한 마디 날리고 남은 담배나 피우며 생각했다. 그거 담배냄새 같은 거라고. 필 땐 좋은 데 다 피고 나면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꼬순내. 그건 향기가 아니라 꼬순내다.
꼬. 순. 내.
(PM 18:50)
오늘따라 사람들이 내 향수를 꽤나 궁금해했다. 좀 과하게 뿌렸나 걱정도 했지만, 뭐 근데 다들 좋다고 물어본 거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몇 명은 이미 인지하고 있더라. 오늘도 그 향수를 뿌렸냐며 물어본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남들이 알아봐 주는 내 향이 있다는 건 좋은 것 같다. 내 본연의 냄새는 아니지만, 이제부터 이걸 내 향으로 만들면 되니까. 내가 지나갈 때 누군가에게 내음을 남기는 건 필요하니까.
지금 내 내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도 있을까.
(PM 22:36)
맥주 한 잔 먹고 돌아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데, 코 끝에 남아있던 그의 내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하고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본다. 내 집이다. 우리 집이 아니라 내 집이다. 내 이불, 내 베개. 내 인형, 내 침대. 내 공간과 시간. 그리고 내 공기 속 나의 '잔향'.
사라졌다. 담배냄새 같은 그거.
꼬순내.
꽃다발의 향보다 꽃 한 송이한테 나는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지 듯. 사람도 같나 보다. 꽃다발 속 모든 꽃의 향을 맡으려다 보니 거리를 두고 맡게 되지만, 꽃이 한 송만 있으면 집중해서 가까이서 맡을 수 있다. 다른 꽃이 옆에 있으면 그의 잔향에 내 향이 묻히고 그의 내음이 묻어 버린다. 그래서 홀로 나와 내 향을 풍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지. 이미 주변 공기에 남아 버린 그의 내음 때문에.
네가 준 향수가 내 향이 되는 날이 오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