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자리바꿈 하는 시기
겨울 끝자락, 오랜만에 붓을 꺼내 본다.
빳빳하게 굳어 버린 끝머리서부터 물에 담가 본다.
차갑고 뾰족하게 굳어 버린 내 손도 서서히 풀린다.
우리가 연필로 가볍게 그려놨던 밑그림을 바라본다.
곳곳에 지웠다 그렸다 했던 자국이 눈에 거슬린다.
그곳엔 색이 존재하고 있지 않아 창백하고 어둡다.
창문 밖은 하나 둘 제 색감을 찾아가고 있는데.
내 앞의 캔버스는 무채색으로 가득하고 공허하다.
흐린 눈으로 봐도 두 곳에서 뽐내고 있는 밝기 차이는 선명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채워지고 칠해지는 공간과
내가 아니면 아무도 덧칠해주지 않는 방구석 속 작은 공간.
창문 너머 존재하는 공간이 부럽다.
1년 후 이 시기에도, 2년 후 이 날에도, 3년 후 이 시간에도
지금과 같은 색으로 자리하게 될테니까.
팔레트 위에 유채색 물감을 하나씩 올려 본다.
누가 정해 놓은 것 마냥 지난 자국이 있는 자리에.
물감들은 제자리서 흰 팔레트에 다시 물들고 있다.
강렬한 색일수록 더 깊고 진하게.
아무것도 없던 팔레트가 갖가지 색으로 채워지니
캔버스가 한 없이 더 초라해 보인다.
색을 갈망하는 듯 보여 서둘러 붓을 들었다.
물을 묻히고 붉은색에 끝머리를 담갔다.
지금부터 정해진 목적지 없이 과감하게 닿을 것.
발가벗은 나무, 백지 같던 하늘, 가시 같던 바람.
눈 위에 그려진 고양이 발자국.
그리고 그 속에서 남겨진 가벼운 웃음들.
아름답고 무용(無用)한 것들이다.
이제 내 색으로 덧칠해야 하는 것들.
우리가 그린 무채색 그림에 내가 선택한 유채색을 덧칠해 본다.
무용(無用)한 것들 중심에 함께 서있던 순간을 기억하며.
그렇게 겨울은 가라앉는다.
무용(無用)한 것들이 있기에 삶에 의미가 덧붙여진 건 아닐까.
그것들에 감사하며 잠시 미소를 지어 본다.
찬 바람 가운데 그때 우린 무엇이 그리도 웃겼을까.
한 페이지를 칠하며 시간을 더듬어 본다.
무엇이 우릴 그토록 행복하게 했는지.
어떻게 알록달록한 색들만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
참 다행이다.
지웠다 그렸다 반복하느라 더럽혀진 캔버스가
내 고유의 색으로 뒤덮일 수 있어서.
본래 색을 찾을 수 있게 돼서.
함께 웃고 지낸 4계절, 그 끝엔 긴 겨울이 있었다.
이제 그 겨울을 깊이 묻어 보려 한다.
그렇게 봄이 내려앉는다.
아무도 대신 덧칠해주지 않는 이 작은 공간이
1년 후엔 어떤 색으로 물들게 될까.
창문 너머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갈망하지 않을 것.
생각지도 못한 수채화가 탄생한다는 건
정말 멋진 결말이니까.
겨울은 가라앉고, 봄이 내려앉았다.
계절이 자리바꿈 하는 시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됐다.
Show me how you see the world.
- <My Love>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