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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떠는 옌 May 14. 2023

Beginning, Middle & End

THE PLOT


아무리 두꺼운 책도 내용이 없으면 가볍게 읽히고,

한없이 얇은 책이라도 내용이 깊으면 한 페이지조차 읽기 벅찰 수 있다.


책의 두께가 내용의 깊이에 비례하지 않듯.

사람도 열어보고 읽어봐야 알 수 있다.




사람은 자라난 환경부터, 취향, 취미, 대화법, 웃음소리, 작은 습관까지 책의 종류만치 가지각색인지라. 이것을 알아가는 것만큼 견문을 넓히는 데 합리적인 게 또 없다.


새로운 개체를 알아가고, 부딪히면서 굳이 맞지 않는 조각을 끼우다 다쳐도 보고, 그 과정에서 내려놓는 법도 배우고, 그 속에서 결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 이 모든 것은 끝끝내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감정적 만남에 지쳤을 무렵. 감정이 닮길 원하기보다 생각이 닮기를 더 꿈꾸게 만드는 사람. 연애 스타일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까지 궁금해하는 사람과 감정 대 감정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대화'를 원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한 페이지를 읽더라도 곱씹어 보고 싶은 책이길 바라며.




The beginning

낭만의 불빛이 가득한 거리. 삼삼오오 모여 낮보다 더 화려한 밤을 즐기는 사람들. 그 가운데 대략 일곱 여덟 명 정도의 남녀가 한 술집에 모였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북적한 분위기. 누구는 옆 사람과 진지하게 인사를 나누고, 어느 누구는 대화를 주도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셋이서 함께 박장 대소하며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하필 나는 여기서 친한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르는 단 한 사람. 바로 이 낯선 사람과 대면하고 있고.


우리는 가볍게 신분을 확인하며 익숙지 않은 인사를 나누었다. 베이직한 질문으로 시작해 시원하고 담백한 답변까지 조심스레 보내본다. 물음표와 느낌표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영화나 글 좋아해요? 네, 사람 사는 이야기 좋아해요. <오만과 편견> 읽어 봤어요? 마침 며칠 전부터 읽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고 물어보셨을까. 제가 고전을 입문하게끔 해준 책이거든요.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불러온 막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막장이라, 마음에 드는 표현이네요. 오만과 편견으로 시작된 사랑. 혐관 로맨스의 시초라 볼 수 있겠네요. 이거 막장 맞네."


막힘없이 들어오는 질문과 빈틈을 채워주는 답변. 언제부턴가 박자감 있게 흘러가고 있는 주제. 정형성을 탈피하고 즉흥적으로 오고 가는 스몰 토크였다. 마치 한 곡의 재즈처럼. 자유롭게 뒤엉키고 어우러져 언제부턴가 관계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었다. 재즈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아주 가끔은 더 듣고 싶은 곡도 생긴다.


그날의 내가 펼친 책과 재즈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그게 관건이지.


시간이 차면 아무리 잘 맞는 대화 속에도 침묵은 꼭 흐르는 법. 꽤나 빠르게 오른 열로 인한 단내를 가라앉히는 시간이다. 대화를 하다가도 누구 하나 그러자 하진 않았지만 서로를 잠시 놓아준다.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긴다.


그렇게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눴건만, 침대에 눕고 나면 생각나는 딱 한 가지. 정적마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을 찾았다는 반가움.


"반가웠습니다."



The middle

"오늘 대화 너무 즐거웠습니다. 반가웠어요. 나중에 시간 괜찮으면 산책하면서 더 얘기해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안부. 첫 만남에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면, 이제는 현재를 이야기한다. 오늘은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밥은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지금은 뭐 하고 있는지. 부담되지 않는 선의 대화가 하루하루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르고 지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내 시간 속에 아주 작은 조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조각이 스크래치만 내고 지나갈지, 빈 공간에 알맞게 끼워져 채워지는 존재가 될진 모르지만. 이미 집어 든 책이니 나도 기꺼이 한 번 읽어 보기로 한다.


지금껏 다 묻지 못한 질문 세례와 다양한 관심이 쏟아지는데. 그때부터가 두렵다. 흔한 보통의 만남 플롯은 항상 이렇게 시작되기 때문. 모든 질문과 관심에 무게를 가지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바람처럼 지나갈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던 때. 나는 바람을 잡아 보려 허공에 손짓하던 순수한 아이였다. 대부분의 엔딩은 허무함이란 걸 받아들이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런데 지금도 쉽게 구분하지 못하고 감히 기대하고 있다. 이 사람만큼은 다르길. 사람으로서의 나를 보고 알아가는 중이길.


물론, 이성으로 봐주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그게 우선시되어 관계를 쉽게 망치는 걸 싫어할 뿐. 사람으로 알아갈 생각이 아닌 이성으로서 감정만 컸던 사람들은 대부분 무례했기에. 한 번 찔러보고 말면 마는 사람으로 가벼이 여겨지고 싶지 않다. 깊이를 아는 사람과 깊게 알아 가고 싶다. 보이는 두께가 어떻든 끝까지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고 싶을 뿐이다.  


오늘도 바람처럼 지나가는 단순한 호기심일까.

나는 지금도 허공에 손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어김없이 의심만 쌓여 간다.



And end

하루 끝에 산책을 즐기게 된 시점. 여전히 물음표를 스스럼없이 건넨다. 그 질문 하나가 하루종일 닫혀 있던 내 입을 열게 한다. 텁텁했던 내 입에 물이 되어주는 대화. 관계에서 대화는 감정의 씨앗이라는 걸 몸소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렇게 오늘도 새로운 꽃을 피워 본다.


"친구가 요즘 관계에 있어 고민이 있다는데. 들어볼래요? 사람이 괜찮아서 시작하기 두려운 관계. 무슨 느낌인지 알아요? 가치관이나 태도의 결도 비슷해서 자꾸 찾게 되고 미묘한 감정에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한데. 막 이성적 감정이 큰 것 같지는 않고. 은은하게 스며들어가는 정도? 대화하고 지내다 깊어진 사이래요. 근데, 꼭 이런 사람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고 닮아가고 싶은 사람인 거 알아요? 그래서 시작을 못하겠대요. 감정이 특별해져서 지속적인 관계로 남기 어려운 날이 올까 봐. 그 끝이 두려워서 자신의 감정을 모면하고 그렇다네요."


이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 나도 모르게 상대를 사랑하는 상상을 해봤다면. 이미 시작한 거겠지. 지금까지 봤던 플롯이 아니라서 읽는 내내 엔딩을 상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끝까지 읽기 두렵다면 책을 덮으면 되는 거 아닌가. 오래 보고 싶은 책이니까.


"이미 시작됐으니까. 오래 대화 나눠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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