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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말고 가야 하는 곳, 나카메구로

2017년 2월 25일

3월 말에서 4월 초가 되면 도쿄 여기저기에서 벚꽃이 핀다. 그때면 유난히 벚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모여 나들이 온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쿄에서 벚꽃이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신주쿠 교엔(新宿御苑) 등 몇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요즘 가장 '힙'하다고 하는 곳이 여기, 나카메구로(中目黒)다.


中目黒
なかめぐろ
나카메구로


봄에 비해 썰렁한 나카메구로



벚꽃하고 아무 상관없는 겨울이지만 날씨는 좋았다. 혹시 추울까 봐 입고 나온 외투가 무거울 정도였고, 설마 하고 매고 오지 않았던 목도리가 다행일 정도로. 오사카에서 온 친구는 그것도 조금 춥다고 투덜거렸지만.


나카메구로를 가기로 한 것은 딱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 친구가 가고 싶어 하는 블루보틀 커피와 아후리가 같이 있는 건 나카메구로 밖에 없어서 (사실 신주쿠도 있었는데 사람 많은 건 싫으니까).  둘, 5월에 도쿄로 날아오실 여사님들의 관광코스로 적합한 지 확인차. 그렇게 겸사겸사 가게 되었다. 친구 덕에 사이타마 촌뜨기(현재 살고 있는 곳. 도쿄랑 가깝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다)도 오랜만에 도쿄 나들이를 다녀왔다.



가는 길 들어갔던 가게. 이 가게 빵이 그렇게 맛있었다



잡지에서만 보고, 티비에서만 들어봤지 나카메구로는 나도 처음이었다. 내가 도쿄에 살았을 적에는 그렇게 유명한 곳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뭐 서울에 가로수길 정도겠지 귀찮아, 하며 가지 않았고. 이번에도 그냥 인터넷 검색을 살짝 해서 괜찮을 거 같은 인테리어 숍만 체크, 친구가 가자고 했던 카페랑 음식점만 체크하고 나왔다. 별 기대 없이 지도만 키고 걷기로 했다.





흔히 많이 경험한다.
맛있다고 하도 그래서 기대하고 찾아갔던 맛집이 그냥 보통일 때,
재밌다고 소문소문이 나서 비싼 돈 주고 본 영화가 별로일 때,
우리는 훨씬 많이 실망한다.
기대했던 만큼 더욱더 크게.
내가 나카메구로를 가기 전,
잡지를 열심히 읽어서 나카메구로에 빠싹 했다면, 티비를 보고 "완전 가고 싶어!"라고 했더라면
바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브라우니를 먹을까 스콘을 먹을까 한참 고민했었다



나카메구로역에 내려서 보통 사람들이 많이 가는 메인 스트리트랑 반대로 걸었다. 집에서 느지막이 나온 터라 밥을 먹기도, 안 먹기도 애매한 시간대여서 블루보틀 커피에 먼저 가려했다. 지름길로 가려고 골목을 들어선 순간 나카메구로의 상점가가 나왔다.



나카메구로 상점가



상점가를 일본어로 쇼우텐가이 しょうてんがい(商店街)라고 하는데 나는 이곳을 매우 좋아한다. 여행을 갔다가 그 주위에 상점가가 있으면 별로 유명한 것이 없어도 굳이 찾아갈 정도로. 사실 이곳저곳의 상점가를 다녀보면 다들 비슷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구경하다가 무언갈 꼭 하나씩 사가게 된다.



보기만 해도 열정이 느껴지는 듯해 한장



결론부터 말해, 나카메구로는 정말, 매우 좋았다. 토요일이라 왁자지껄하면서도 붐비지 않는 상점가도, 촌스러운 가게 사이사이 위치한 세련된 가게들도, 해가 떨어질 즈음 불이 들어와 있던 전구들도, 금방 골목으로 빠지면 다시 조용해지는 주택가들도. 내가 생각하는 '일본'의 이미지가 모두 이 곳에 있었다. 어쩌면 메인 스트리트가 아니라 여기부터 들렸던 것은 '베스트 초이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생각 없이 모래사장을 걷다가 맘에 드는 조개껍질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나카메구로에 있었던 거라고.



블루보틀커피에는 좌석이 그렇게 많지 않다



친구와 입이 쩍 벌어져서 빠른 걸음으로 쏘다녔다. "여기 너무 분위기 좋다", "여기서 살고 싶다"를 연발하며 좀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거리가 이렇게 이쁘고, 블루보틀 커피도 이렇게 맛있고, 도쿄에 이렇게 근사한 곳이 있었는데! 친구에게 도쿄에 살 적에 여기 안 오고 뭘 했냐고 타박을 들었다. 그러게, 난 뭘 했던 까(물론 그블루보틀은 없었지만). 그래 놓고 도쿄에 갈 곳 없다고, 서울이랑 똑같다고 맨날 떠들고 다녔었다. 사람은 다녀 볼 일이다. 옛말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틀린 거, 하나 없다.



나카메구로 철로 밑에는 전국 맛집들이 쪼로미 자리해 있다



메인스트리트로 이동했다. 밤이라서 벚꽃나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천변으로 연인들이 많이 걷고 있어서 나름 로맨틱했다. 우리도 따라 걷다가 골목골목 숨어 있는 숍들을 찾아 나섰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사람들이 많이들 가는 가게는 금방 나오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 한번 쓱 둘러보고 금방 나왔다. 괜찮은 옷을 찾았던 가게에서는 점원에게 빈정 상해서 사지 않고 나와놓고, 빈지티 숍에 들어가서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는 예쁜 반지를 비싼 값에 샀다 (그러면서 예쁘니까 잘했어, 라며 몇 번이고 위안했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지만, 나는 나카메구로에서 그다지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찾아왔던 숍들 중에서 한 곳만 체크를 해뒀다. 나중에 여사님들 오면 데려가야지. 기대를 하고 왔다면, 크게 실망할 뻔했다.





우리가 너무 늦게 나카메구로에 도착했나 보다. 조금 돌아다니고 구경하다 보니 벌써 저녁이 되어버렸다. 해가 다 져서 어둑어둑해지면 나카메구로의 옷가게나 숍들은 하나둘씩 닫을 준비를 한다. 레스토랑도 10시 정도가 되면 손님을 내보낸다.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한국과 다른 풍경이다. 이곳저곳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음식점들은 많았지만, 우리는 아후리 라멘을 먹어야 했기에 그저 보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유자라멘으로 유명한 아후리에 가서 매운 라멘을 시켜 먹었다



평소 면요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라멘은 특히 즐겨먹지 않아서 츠케멘(つけめん)을 시켰다. 츠케멘은 처음부터 시루(국물)에 면이 빠져 있는 라멘과 달리, 면과 시루가 따로 나온다. 면을 조금씩 시루에 찍어 먹는데, 그래서 츠케멘 시루가 라멘 시루보다 간이 더 세게 되어 있다. 처음 츠케멘을 알았을 때는 "어차피 같이 먹을 거 왜 비생산적이게 따로 먹어?"라고 했었는데, 따로 먹으므로써 면의 쫄깃함을 더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시킨 츠케멘도 굉장히 면이 쫄깃했다. "시루가 차갑게 나오는데 면도 차갑게 드시겠어요?"라고 묻길래 그러세요 했는데, 정답이었다. 몇 번 먹어보진 않았지만, 이제까지 먹은 츠케멘 중에 제일 맛있었다. 편의점에 아후리 컵라면이 있던데 다음에 한 번 사 먹어 봐야지.





이래 봬도 나름 계획적인 인간이라 어디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철저히 준비하는 편이다. 뭔가 잘못되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싫어서. 만약 내가 한국에서 나카메구로에 관광으로 왔었더라면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점심은 여기서 먹고 무슨무슨 숍에 갔다가 저녁은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지, 까지 다 짜서 왔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말 확실하게 말하건대, 나카메구로는 그런 계획 없이, 머릿속을 텅텅 비워 와서 편히 산책하다 가면 된다. 혹시 그러다가 여기서 놓친 가게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도 갈 수 있다(아마). 그렇게 하는 편이 나카메구로를 훨씬 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은 꽤 붐벼도 나카메구로는 봄에 오는 것이 좋다. 겨울은 역시 앙코 빠진 찐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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