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람이 서울 사람보다 빠른 것
'빨리빨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부사이다.
오죽하면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전시회 중 하나의 제목이 'Séoul, vite, vite! (서울, 빨리, 빨리!)'였을까.
빨리 먹기 위한 배달, 빨리 사기 위한 24시간 편의점, 빨리 업무를 끝내기 위한 야근, 빨리 아이를 낳아 퇴직 이전 대학 등록금 복지혜택을 보기 위해 서두르는 결혼. 아울러 누구보다 신속한 행정, 의료, 요식 서비스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는 알다시피 여유가 넘치는 나라이다. 시간이 정지한 도시미관과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미 급한 한국인의 눈에는 빈틈과 빈 공간과 줄일 수 있는 납기가 군데군데 보인다. 여유가 흘러넘쳐 휴가도 5주나 가고 밥도 3시간씩 먹고 말이지.
이런 곳에서 여유롭게 지내다 보니 문득 남자 친구의 언어습관에서 '얼른'과 '빨리'가 귀에 걸렸다. 이를 알려주니 본인도 꽤 놀라워했다. 습관처럼 '얼른' 무언가를 하고 다음 것을 해치워야 한다는 게 몸에 배어있으니 그런 것이겠지.
다만, 파리지앵들이 한국인보다 빠른 게 있다. 바로 걷는 속도. 지하철 환승통로의 파리지앵들을 보면 얘네가 세상에서 제일 조급한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빠르게 걷는 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빠르지 않은 편이었다. 길거리와 지하철 환승통로의 파리지앵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걷는다, 아니 거의 달린다. 물살처럼 모두가 일정한 속도로 빠르게 걸어가지만 신기하게도 어깨를 부딪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 통로에서 두리번거리며 흐름을 막으면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다.
길거리 역시 마찬가지인데 특히 출, 퇴근 시간의 사람들은 정말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쏜살같이 지나간다. (나도 이제는 모두를 앞지를 만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허벅지 근육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무단횡단을 한다. 차가 없는 빨간불에 건너지 않는 것은 이제는 루저같아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자동차들도 빨간불에 사람이 건너도 웬만하면 기다려준다. 제일 재밌었던 순간은 빨간불이 바뀌는 순간 지팡이를 짚으며 한 발자국 내딛기 시작하신 할머니를 본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무단횡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로들이 넓기도 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게 너무 당연해서 나 역시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기이한 조급함에서도 신기한 게 존재하는데 다들 그렇게 축지법 쓰며 걸어가도 무거운 짐 들고 가는 사람과 유모차는 다 들어준다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파리 지하철은 계단 지옥인데 캐리어나 유모차를 혼자 들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지나가던 이가 쿨하게 무표정으로 스윽 들어준다. 도와주려는 의도인지 내 길을 막으니 내가 치워버리겠다는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 다들 급해 죽겠는데 지하철 출구 (수동) 문은 뒷사람이 지나가도록 잡아준다, 역시 무표정으로. 그럼 모두가 또 고맙다고 해준다. (인사의 나라 프랑스.) 나는 처음에 문을 잡아주는 이 사소한 에티켓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는데 올봄 잠깐 한국에 갔을 때 적용해보니 뒷사람들이 몸만 쏙쏙 빠져나가서 상당히 당황했었다.
왜 사람들이 빨리 걷는가에 대해 고민을 해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길거리와 지하철의 불쾌함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해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는 5분 동안 거지를 대여섯 명 마주치고, 지하철에는 지린내가 진동을 하며 역사에도 거지를 최소 두세 명은 기본으로 보니... 다 정글 같아서 우리 모두 가젤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