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 이번 달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나에게 초능력이 생겼다. 처음 능력이 발현됐을 때 이게 뭔지 확실치도 않았고, 우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이게 내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자 했다. 6월 10일쯤 처음 능력을 느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약 3주간 유지하고 있다. 2주쯤 되었을 때부터는 엄마에게, 친구에게 고백을 했다. 이 능력은 수의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며 그럴 성질의 능력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능력이 잘 발현되는 조건을 알게 되어 어느 정도 유도할 수는 있게 되었다.
배경: 월경통뿐 아니라 배란통까지 심하게 겪는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완경 전까지 이 끔찍한 통증과 함께 살아야 하는 몸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완벽하게 맞는 진통제를 찾은 이후로는 통증이 전혀 없다. 이 약은 작은 것이 있고 큰 것이 있는데 작은 것을 먹으면 통증이 거의 사라지고, 큰 것을 먹으면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다가 약간 약에 취한 듯 행복해진다. 큰 약을 먹으면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이고 마음이 평온해지며 관용의 능력이 극대화되어 목소리까지 차분하게 변한다. 약사인 아빠는 그건 내가 필요량보다 좀 더 많이 먹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작은 알약을 먹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의존성 없는 비마약성 진통제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한 달 중 약 일주일은 평소보다 더 행복하게 보내기로 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약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첫 발현: 2022년 6월 월경이 끝나고 며칠 뒤, 나는 통증도 약도 없이 갑자기 이 진통제의 부가적 효과인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여름날 에어컨을 틀어놓은 시원한 집 안에서 쉬며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행복감,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담요 속에 파묻히는 행복감, 너무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해 그 작가의 전집을 구매하고 하나씩 읽어나갈 기대에 부푼 행복감은 모두 다 약간씩 그 맛이 다르다. 이 약이 주는 행복과 평온함도 그만의 특유의 맛이 있는데, 이 날 느낀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닌 그 약이 주는 행복감 그 자체였다. 나는 통증도 없이, 약도 없이 명백하게 느껴지는 이 약간 취한 듯한 행복감이 찾아오자 매우 놀랐다. 누구도 나를 짜증 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모두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발현과 반복: 그 이후에도 자주 그런 일이 있었다. 능력은 언제나 내 책상이나 거실 탁자 등 내 앞에 나무로 된 판자 같은 것이 있을 때 찾아왔다. 그 두 곳은 내가 언제나 책을 읽는 곳이다. 책을 읽을 때는 이 능력 발현의 빈도가 잦다. 특히 책의 좋은 구절을 읽고 잠시 침묵의 세계에 빠져들 때 강하게 찾아온다. 행복감이 지속될 필요는 없었다. 한번 찾아오면 남는 뒷맛이 길어 오래 평온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배가 아프거나 할 때면 통증은 그대로 있지만 행복감은 찾아왔다. 그래서 특별한 약 없이도 통증이 참을 만 해졌다.
예외: 항상 집안에서만 찾아온 능력이었는데 6월 23일 처음으로 바깥에서 느꼈다. 친구와의 좋은 대화 후 잠시 선명해진 침묵을 마주하던 중이었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6월 30일인 오늘 운동을 끝낸 후 밥을 먹다가 내 새로운 능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예상치 못한 순간 오는 행복감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의미가 크다.
분석: 이 진통제를 오래 먹다 보니 내 뇌가 이 감정을 진통제 없이도 그냥 만들어내는 방법을 어느 순간 배워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먹은 지는 수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이런 습득을 해낸 것이 의아해서 다른 이유를 찾아봤는데, 내가 6월에 읽은 책 3권이 연속으로 나에게 엄청난 평온과 인류애를 주었다는 자각을 했다. 평소에는 굳이 쳐다보지 않았을 주제였는데, 뉴스도 보기 싫을 만큼 우울과 짜증이 당연한 시기라 집어 들었던 책이다. 첫 번째 책 <작은 것들이 만드는 거대한 세계>는 곰팡이 균에 대한 과학책이다. 과학책은 워낙 좋아해서 자주 읽긴 하지만 이렇게 인류애 가득한 책일 거라 예상하진 못했다. 학자인 저자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아주 쉽게 풀어쓰면서도 그 안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과 믿음을 잘 녹여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울컥했다. 두 번째로 읽은 <비폭력대화>는 아주 유명한 책인데, 서평을 쓴 자가 평소 내가 약간 한심해하며 비웃던 사람이라 솔직히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기술로 대화에서 폭력을 제외하며 듣고,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아직 훈련 중이긴 하지만 이 기술은 내 주변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을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읽은 <전념>은 나에게 다시 먼 곳을 볼 수 있는 눈과 희망을 주었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 하나를 켜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 주었다. 책이 한 인간에게 초능력을 줄 수 있을까? 가장 좋아하는 책은 따로 있긴 한데, 이 세 책은 남달랐던 것 같다. 증오와 혐오의 감정으로 가득했던 2018년의 나로 돌아간 듯 절망이 차오르던 순간에 시기적절했다.
결론: 아직도 100퍼센트 내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여러 가지가 걱정이다. 다음 달 월경이 찾아왔을 때 다시 진통제를 먹은 후 내 소중한 초능력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안 먹을 수는 없을 텐데.. 친구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여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배우고자 하는 시기였는데 이런 새로운 능력은 괜찮은 걸까? 원래 좋아하던 책을 읽으면 이 초능력 발현 빈도가 줄거나 사라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 능력이 사라질까 봐 가장 걱정이다. 이 능력은 어떤 다른 생명이나 보조제의 도움도 없이, 나에게 너무나 선명한 행복을 준다.
영어 표현 중 "somebody's happy place"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이 찾아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 가상의 행복한 장소로 보내어 고통을 견뎌낸다. 누군가 자기의 happy place로 간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능력이 생긴 이후 나의 이 새로운 능력이 happy place와 비슷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이 능력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어떤 장소든, 시기든, 기억이든 더 형성적, 실제적인 것으로 빚어낸다면 수의적 조절이 가능해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