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 Jun 24. 2022

20220624: 가장 먼저 포기할 수 있는 예술은?

중고등학생 때 나는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너무 강렬하고 현실적인 나의 자아라는 생각에 나는 뭔지 모를 긍지를 가지고 그것을 여기저기 굳이 말하고 다니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가 끝나면 근처에서 조금 놀다가 네시 반 다섯 시쯤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그러기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나는 항상 라디오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걸어오는 길은 날이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그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길 양쪽에는 일부러 심어놓은 나무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어 내 눈 안으로 찢어진 햇빛이 드문드문 나들었다. 나는 하늘을 보다 땅을 보다 하면서 걸었다. 집 근처에 도착할 때쯤이면 어떤 계절은 노을 직전의 햇빛이 있었고 어떤 계절은 어스름하기도 했다.


요즘 10년 만에 그 길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여덟 시쯤 다시 걷는다. 처음 다시 그 길을 걸었을 때, 학생 시절 걸었던 시각보다 겨우 영화 한 편 끝날 정도 지났을 뿐인데 전혀 새로운 거리를 걷는 것처럼 낯설었다. 학생 때 음악을 듣느라 일부러 늦추던 나의 걸음이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하느라 늦어졌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나무들을 같은 마음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은 꼭 해가 떨어져서만은 아니었다. 내 안의 무언가 바뀐 것이다. 어둠을 입은 나뭇잎의 향은 상쾌하고 서늘하다. 나는 그도 그 나름대로 즐긴다. 음악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차라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좋다.


요즘 나는 가장 먼저 포기할 예술을 음악이라 말한다. 내가 말하는 음악은 가수가 가사를 붙여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들을 주로 뜻한다. 이런 음악 없이도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상이다. 찾아서 음악을 듣는 일이 거의 없다. 피아노를 가끔 치긴 하지만 좋아하는 캐럴을 모두 피아노로 치고 싶다는 버킷리스트 때문에 하는 것에 가깝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변화가 내 안에 일었다. 이 변화가 슬픈 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트라우마라고 할 것도 없고 나에게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며 음악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게 어떤 손실인지, 무엇이 죽었는지 모르겠다. 그림이나 글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음악은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다.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막상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음악 없이 못 살겠다던 그때가 아주 그립거나 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슬픔 또는 현실감의 부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