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록의 대상이 되는 기이한 사건들은 2020년 지구에서 일어났다
너무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읽어야만 했던 책이다. 2020년, 벌써 4월이다. 작년에 분명 내년에는 괜찮아지겠지 하고 외쳤었지만 2020년은 시작부터가 난항이다. 호주에서의 산불, 펜데믹, 그리고 이제는 대공황을 예견하는 경제위기가 올 차례다. 서점에서 추천하는 책들의 목록들을 보면 시대상을 보여주듯이 페스트가 단연 앞이다. 그가 그리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는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 마냥 생생하다.
본 기록의 대상이 되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났다.
카뮈는 오랑의 묘사를 그의 키워드 같은 부조리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은 따분해하다가 익숙해지려 애를 쓴다.
쥐가 나왔다. "짐승은 그 자리에 멈춰서 균형을 잡으려는 듯했지만 의사를 향해 돌진하다가 다시 한번 멈춰 섰고 짧은소리를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더니 반쯤 벌린 주둥이에서 피를 쏟으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의사는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나도 잘은 몰라. 이상하긴 하지만, 뭐 그러다 말겠지.
이 책은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저자의 정보를 최소화한다.(이유는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리라!) 하지만 의사 리유의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하게 단조로워 보이지만(원서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태도는 계속해서 달라진다. 어떤 이야기가 진행됨에 있어 독자의 입장,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단연코 '그 부분을 놓치면 안 돼!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라고 속으로 외친다. 뻔하니까. 인생의 길이에 비하면 모든 것이 단편이라고 볼 수 있는 책들과 영화들의 서사 구조는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익혀왔던 것이 아닌가. 진짜 문제는 실전이다. 내 인생에서 '이상하긴 하지만, 뭐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는 심각한 사태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리유는 자신이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방역소에서 나서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명령이 있어야 그렇게 하지."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시에서부터 발현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2020년 1월만 해도 심각한 사태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중국에서 급격하게 퍼지고 있었지만 WHO는 글로벌 펜데믹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다는 얘기만 했다.(그것도 수십 번) 미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고도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미국 병원들의 산소호흡기가 부족했지만 트럼프는 필요한 의료 기구들을 다 지원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 내 사망자가 급증하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트럼프는 아이러니하게도 WHO의 늦은 발표를 탓했다. (어제자 뉴스로 아주 따뜻한 내용이다.) 그리고는 앞으로 WHO 지원금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만약 지원금을 끊는다면 WHO가 다른 국가들에 대한 지원 능력을 잃게 된다.)
이 소설은 현재를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두려움, 그와 동시에 반성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그리고 느끼는 우리들은 반성을 하였던가? 아니면 책임을 전가하기만 했던가?
심지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 안 되는 환자들이 신고도 없이 지금 이 순간 페스트로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사 리유가 자신의 친구 앞에서 인정했을 때조차도, 위험은 그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었다. ... 인류의 역사가 경험한 30여 차례에 걸친 끔찍한 페스트가 1억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음을 떠올렸다. 한데, 1억의 사상자들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한 명의 사상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도 도무지 제대로 알 길이 없다. 한 명의 사상자란 그가 죽은 걸 우리가 보았을 때야 비로소 중요성을 가지며, 인류의 역사에 걸쳐 뿌려진 1억의 시체들은 그저 상상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
사망률. 그 퍼센티지가 주는 가벼움은 나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게 된다. 나는 아는 사람 중 바이러스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오늘 친구의 아버지가 코로나로 사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본국인 영국에 계시지만 친구는 자신의 고향으로 갈 수 없다. 이 비보에 의미를 많이 두지 않았던 사망률 수치에서 친구의 슬픔을 보았다.
우리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지니고 있던 그 공허함,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고 싶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흐름을 재촉하고 싶다는 가당치 않은 욕망, 너무나도 또렷한 그 감정, 불붙은 채 날아가 버리는 화살과도 같은 그 기억, 그것은 분명 유배의 감정이었다.
2020년 1월 퇴사를 하고 여행을 계획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휴직 기간은 꽤 멋졌다. 친구들을 만나고 해외여행을 가고 맛집을 다니고. 하지만 이 기나긴 유배기간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계속 묻게 되는 시지프 신화 같은 부조리함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패배의 연대의식. 나는 이렇게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오랫동안 인류의 도덕성 결여와 자본주의 실패로 이미 인류는 패배했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신문에서 영웅들과 성인들을 찾곤 했다.
열린 책들의 번역서를 읽었다. 번역서는 아무래도 읽는 게 불편했다. 문장이 어떻게 구성된 건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여러 번 읽어서 의미를 이해해야 했다. 물론 번역자는 원문의 뉘앙스를 보여주고 싶었을 테다. 그래도 불편하게 읽었다.
또, 인물들의 이름이 자꾸 헷갈렸다. 의사 리유만 정확하게 기억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자꾸만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었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나는 아무래도 외국이름을 외우는 데는 젬병 같다.
위 두 가지 이유에서라도 먼 훗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들로 남겨놓을 거다. 다음번에는 영어로 읽어봐야겠다.
별점: 3.5/5
총평: 소름 끼치게 현실을 닮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