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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dy Aug 29. 2020

선택지가 없는 삶도 살아내겠다는 선택

프랑스 퀴어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사람이 가장 막막해질 때는 언제일까.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먹지 못할 때?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을 때? 각자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인간이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선택지가 없다고 느낄 때인 것 같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에서 빠져나가고 싶지만 애초부터 그런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할 때, 큰 맘 먹고 도전했는데 처음부터 내가 진입할 수 없는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의 삶에서 주어진 선택지가 지금보다 다채롭지 못했던 18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당대에는 보기 드물었던 여성 초상화가인 '마리안느'가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를 만나 초상화를 그리면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귀족가문의 여성이 결혼을 할 경우, 초상화를 일종의 예물처럼 챙기는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초상화가 마리안느 (배우 노에미 메를랑)


만남과 떠나 보냄의 매개가 되는 초상화

극중 화가인 마리안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길 거부하는 엘로이즈와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면서 그녀를 그저 한 명의 모델이나 대상이 아닌, 사랑하는 연인으로 바라보게 된다. 덕분에 남성의 시선이 중심이 되는 작위적인 초상화가 아닌, 엘로이즈의 까칠하면서도 당당한 면모가 그대로 담긴 초상화가 완성된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완성하면 사랑하는 엘로이즈를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도록 떠나 보내줘야 한다. 이는 프랑스 18세기 후반의 보수적인 사회상 속에서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하는 이들의 애틋한 관계를 더 부각시키는 것 같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초상화가 마리안느 (배우 노에미 메를랑)


여성이 드문 초상화 업계에서 일을 하며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 받으려는 다소 진취적인 마리안느에 비해 세상 경험이 적고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중매 결혼에 응해야 하는 엘로이즈가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은 극중 등장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과 묘하게 닮아 있다. 독사에 물려 이른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지하세계에 간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을 빠져나오는 문 앞에서 뒤를 돌아와 아내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는 이야기.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행동으로 사랑하는 연인인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날 수 없는 지하세계에 영원히 남겨둔 채 지상으로 올라온다. 이는 초상화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엘로이즈를 보내주고 이별할 수밖에 없는 마리안느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엘로이즈 (배우 아델 에넬)


'여성'의 시선, 여성의 '시선'

영화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시선과 대화로 전개된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초상화를 배달해주는 짐꾼이나 뱃사공, 살롱(Salon)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구매하기 위해 온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다. 특정 인물을 끊임 없이 관찰해야 하는 마리안느의 직업 특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영화는 여성의 시선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다보니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바라보거나 응시하는 장면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배우들의 시선 처리와 눈빛 연기도 물론 한 몫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엘로이즈 (배우 아델 에넬)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여성 인물 간의 우정이 돋보이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저택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하녀 '소피'는 주인 마님이 집을 비운 사이 각자의 사회적 계층과 신분을 무시한 채 밥을 나눠 먹고 책을 읽으며 허물없이 어울린다. 특히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소피가 낙태할 수 있도록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갖가지 민간요법을 도와주고, 고통스러운 시술을 받는 소피 옆에 서서 지켜보는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엘로이즈는 소피가 낙태를 하는 순간마저도 그림으로 남겨놓자고 말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여성으로서 겪는 즐거운 일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여성 인물들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연출이 좋다고 생각했던 장면, 낙태하는 소피 옆에서 아이들이 손을 잡는다.


비발디 사계 여름

영화가 끝나면 이 음악을 꼭 한 번 다시 찾아 듣게 될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마지막 장면을 훌륭하게 마무리 짓는 음악인 동시에, 짧은 순간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떠나 보내기까지 겪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유튜브와 몇몇 오프라인 극장에서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하고 시간이 꽤 지났으나, 한 번 본 관객들이 팬이 되어 N차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예고편 보러가기 : https://youtu.be/rv-m744KK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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