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dy Aug 13. 2018

영화는 영화다 : 성반전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

웃음기를 싹 뺀 성반전영화 <억압받는 다수(MAJORITÉ OPPRIMÉE)>로 사람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했던 엘레오노르(ELÉONORE POURRIAT)가 이번에는 유쾌한 코미디 영화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재는 페미니즘. 10분 남짓한 단편영화였던 '억압받는 다수'가 짧지만 굵직한 성반전 묘사로 구성된 티저였다면, 넷플릭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Je ne suis pas un homme facile)>는 1시간 30분 분량의 장편이다. 유머감이 가미되어 훨씬 편안하게 볼 수 있지만, 감독 특유의 디테일한 성반전 묘사는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을 충실하게 비판하며, 불편한 현실에 익숙해진 이들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부조리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넷플릭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 (image ⓒallo_cine)


프랑스 원제는 'Je ne suis pas un homme facile'로 '나는 헤픈 남자가 아니야'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거꾸로 가는 남자>라는 제목은 명사형으로 끝내길 좋아하는 한국어판 번역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대목인데, 아마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짐작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을 거라 예상한다.


다미앵 (image ⓒallo_cine)

영화를 구성하는 두 개의 세계

영화의 1부는 가부장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남자 주인공 '다미앵'의 관점으로 먼저 시작된다. 남성의 섹스 횟수와 성기능 수준(?)을 기록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다미앵은 여성을 사냥과 정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남성우월주의적 캐릭터다. 회사에서, 서점에서, 카페에서, 자리를 막론하고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성희롱을 일삼는 다미앵은 주변 여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다. 그러던 어느 날, 전봇대에 머리를 크게 부딪히고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180도 바뀌어 버린다. 여성이 기득권이 되는 여성우월주의 사회로 넘어온 것이다.


여성이 기득권인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반전된다. 어디서든 여성이 디폴트가 되고, 남성은 유별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커피를 타오는 것도 남성, 엉덩이에 뽕을 넣는 것도 남성, 과학자가 남성이면 반드시 '남성 과학자'로 표기해야 하고,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육아휴직을 얼마큼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건 남성이다. 우리 사회가 공고하게 쌓아 올린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이 영화가 바꾼 것은 오직 남녀의 성 하나뿐인데, 영화를 보는 내내 모든 요소가 새롭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여성에겐 당연했던 현실이 남성의 관점으로 바뀌니 전혀 당연할 수가 없다. 다미앵은 이 어지러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남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코르셋을 하나둘씩 입기 시작하고, 유명 작가인 '알렉산드라' 집의 개인 비서로 취직하게 된다.


여성이 기득권인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반전된다.
어디서든 여성이 디폴트가 되고,
남성은 유별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다미앵 (image ⓒallo_cine)


'나는 헤픈 남자가 아니야'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알렉산드라가 유명 작가의 비서였지만, 뒤바뀐 사회에서는 다미앵이 알렉산드라의 비서가 되어 그의 집을 청소하고 서류 작업을 담당한다. 남성편력이 심하지만 유능한 작가인 알렉산드라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서 근무하게 된 다미앵은 어느새 알렉산드라의 비서인 동시에 애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기존의 가부장적인 세계를 그리워하는 다미앵으로부터 작가인 알렉산드라가 다시 영감을 받고, 그걸 토대로 '나는 헤픈 남자가 아니야'라는 원고를 써낸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오랜 역사 속에서 언제나 여성들이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로 등장했다는 점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센스 있게 비꼰 설정이 아닌가 싶다. 


달라진 건 성 역할 하나뿐인데,
영화를 보는 내내 기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면
감독의 의도에 맞게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 테다.


여성 중심적인 세계에 점차 적응해 가며,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서게 된 다미앵은 남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시위에 직접 나서고, 출산 후 아내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스스로를 꾸미고 가꿔보라는 뼈 아픈 조언을 한다. 이런 그들에게 '내가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혹은 '나는 내 남동생과 아버지를 사랑한다고!'라고 외치며 조롱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이질적인 동시에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남근이 아닌 유방이 권력의 상징인 사회에서 다미앵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오는 사이 달라진 건 성 역할 하나뿐인데, 영화를 보는 내내 기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면 감독의 의도에 맞게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기괴한 느낌은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세상의 절반이 일상적으로 겪어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면, 이 영화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걸까.

유방 모형을 달고 시위하는 남성연대 (image ⓒallo_cine)

영화는 영화다

그렇다면 유방이 권력이 된 사회의 결말은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다미앵이 우연히 여성우월주의 사회로 발을 들이게 된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격 설정을 지닌 이 영화가 끝을 맺으려면, 다시 이들을 원래의 세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무방비 상태로 성희롱을 당하고 있던 다미앵을 구하려던 알렉산드라는 싸움을 말리던 도중, 다미앵과 함께 머리를 크게 부딪히고 이 '꿈같은 세상'으로 다미앵을 데려왔던 앰뷸런스에 우연히 탑승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부디 알렉산드라가 이 세계를 벗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독은 알렉산드라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이제는 그 꿈 깨라'라고 말한다. 앰뷸런스에서 내린 알렉산드라가 생경한 눈으로 목격하게 된 사회는 우리에겐 결코 생경하지 않은 지금의 사회. 남성이 디폴트가 되고, 오랜 시간 여성의 동등한 삶과 권리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싸워 온 남성 중심적 세계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한 알렉산드라가 발을 내딛는 장면은 영화에 몰입했던 시청자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현실적인 기시감을 전해준다. 그리고 페미니즘 시위대의 틈바구니에서 알렉산드라가 다미앵과 조우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성역할이 반전된 비현실적인 사회상을 보여주다가 현실세계로 돌아와 결말을 맺는 방식은 <억압받는 다수>와 <거꾸로 가는 남자>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다만, <억압받는 다수>는 남편에서 아내로 시점이 이동되는 단순한 플롯으로 이루어졌다면, <거꾸로 가는 남자>는 영화 속에 가부장제 사회와 가모장제 사회를 평행우주처럼 각기 다른 차원의 세계로 존재토록 하는 설정이 두드러진다. 동일한 등장인물을 토대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 여성 중심적인 사회 모두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시켜주려고 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하지만 다미앵이 살아가던 가부장제 사회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인지, 알렉산드라가 주인공이 되는 여성 중심 사회는 <거꾸로 가는 남자>라는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남성이 디폴트인 사회와 여성이 디폴트인 사회가 동일한 무게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한계는, 아니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의 한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알렉산드라의 세상은 그저 상상이나 영화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슬픔이 우리에게 내려앉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알렉산드라/왼쪽 (image ⓒallo_cine)




이 영화가 퇴물이 되어버릴 그 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알렉산드라'가 겪고 있는 일상적인 차별을 바꾸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결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남성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다미앵이 페미니스트들의 시위대 속에서 알렉산드라에게 손짓하는 장면. 누군가는 틀에 박힌 결말이라 할 수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지나친 이상주의라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두 성별이 함께 연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미앵의 현실도, 여성이 기득권이 되는 알렉산드라의 세계도 결코 온전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영화가 역사 속의 퇴물이 되어버릴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너무나도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의 공포, 현실로 이어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