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27. 2020

열정 기계의 부품을 교체하다

회사 이야기

처음 그 영화를 본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개봉했던 해가 2001년인 걸 보니 꽤 오래전이다. 그 이후로 서너 번 정도 더 찾아본 듯하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은수(이영애)의 이기적인 사랑이 이해되지 않았고, 상우(유지태)의 속앓이 사랑이 안타까웠다. 라면 먹고 가라면서 옆구리 쿡쿡 찌를 때는 언제고, 나중에는 딴소리하는 은수가 얄밉기도 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해서 저런 일을 당한다며, 남자는 여자를 볼 줄 모른다며 상우를 동정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속 은수의 나이쯤에 영화를 다시 보니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많이 달랐다. 좋은 영화는 그래서 세월을 벗 삼아 두고두고 보라고 하나 보다. 처음에는 상우의 감정으로 봤는데, 이후에는 은수의 감정으로 보게 됐다. 정확히는 은수의 감정이 마음에 더 와 닿았다고 해야 맞다. 순수했던 상우의 사랑이 철없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은수는 이미 상우와 같은 사랑을 겪고 난 후여서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듯하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영화를 봤을 때는 두 사람의 사랑은 보이지 않더라. 사랑은 참 덧없다며, 사랑 그거 뭐라고 사람들이 목메는지 모르겠다면서 신흥사 툇마루의 햇살과 맹방 해수욕장의 쓸쓸한 파도소리가 더 뇌리에 남았다. 우리나라에도 가 볼 곳이 참 많아... 라면서.

   

감독은 왜 봄날이라고 했을까. 봄날은 시작하는 시기로, 서툴지만 통통 튀어 오르는 감정과 맞닿는다. 가슴이 뛴다. 실수가 생기고 좌충우돌 힘든 시기를 겪지만, 어떤 일에서나 시작은 있으니 누구든 봄날을 겪게 되리라. 상우의 사랑과 어울리는 계절이다.


여름날은 어떤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푸른 날이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시기만큼 감정이 훅 달아올라 열정적이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로 그 열정이 훅 식기도 한다. 봄날보다 길게 느껴지고, 감정의 기복마저 심한 시기라서 여름날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기도 한다. 청춘에 어울리는 계절이다.


열정이 지난 가을날은 고독하고 쓸쓸하다. 여름날이 외면적으로 방황했던 시기라면 가을날은 내면적으로 방황하는 시기라고 해야 하나. 가을날을 겪고 나면 내면이 풍성해지고 원숙해진다고 말한 시인도 있으니 사색의 계절이 맞긴 한 듯하다. 상우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네.


계절의 끝자락인 겨울날은 열정이 식는다. 마음이 춥고 몸이 움츠러든다. 다시 봄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상우도. 은수도 여전히 사랑을 갈망하니 이 계절도 어울리지 않네.

           

일을 하다 보면 지금이 어느 계절인지 생각할 때가 있다. 처음 시작하는 일에는 봄날과 같은 감정과 행동이 나타난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고,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일이 손에 익으면 있던 열정 없던 열정이 다 끓어오른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넘쳐흐른다. 남들보다 일을 더 하는 것은 회사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벽에 부딪치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회사가 나를 부속품처럼 대하면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와 맞는 일을 찾게 되고 나와 맞지 않는 일을 멀리 한다. 열정적으로 일했는데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뒤돌아서서 허탈한 마음을 느낀다. 그러다가 얼음처럼 차갑게 열정이 식는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절을 느끼기도 하지만, 5분 정도 짧은 시간 동안 계절을 만나기도 하고, 10년 정도 긴 시간을 거치면서 계절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사랑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나 일에도 사계절이 있어 기복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떤 계절에 들어와 있는지는 계절을 빠져나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이나 사랑은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누군가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사계절에 골고루 열정을 나눠주고 싶다. 봄날같이 설레면 심장병에 걸릴 듯하고, 여름날같이 열정적이면 지레 녹초가 될 듯하다. 가을날과 겨울날에는 열정 부족 현상까지 겪으니까. 늘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랑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 열정을 몰빵 하지 않고 나누련다. 내 인생인데 누가 뭐라고 한다고!


순간적으로 타오른 열정 부품은 쉽게 꺼지거나 금방 포기할 수 있으니 은근하지만 오래 버틸 수 있는 열정 부품으로 바꿔 끼워야겠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도 스펙터클 하게 재미있지만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담담하고 밋밋한 감정도 때로는 필요해 보인다.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댄 세대, 낀 세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