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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May 10. 2019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 김연수 소설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채로 미국 중산층 가정에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 한국 이름은 정희재다. 양모 앤의 죽음 이후 양부로부터 택배 여섯 상자를 받는데, 그 속에서 동백꽃이 떨어진 교정을 배경으로 아이와 어린 학생이 함께 찍힌 흑백 사진을 발견한다. 카밀라는 사진 속 어린 학생이 엄마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사진 속의 그녀를,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한국의 ‘진남’이라는 도시를 찾는다. 진남여고 교장인 신혜숙은 처음부터 카밀라를 배척하는 듯 보였고, 열녀문 앞에서 학교의 전통과 여성의 순결에 대해 설파한다. 카밀라가 찾고 있는 그녀는 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거짓 증언까지 덧붙인다. 지역 신문에 카밀라의 입양 과정이 소개되고, 이후부터 카밀라가 예상하지 못한 감춰진 사실이 드러난다.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은 친오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추문에 휩싸였고, 아이의 친부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아이를 빼앗겼고, 그 아이는 낯선 외국으로 입양되었고, 혼자 외롭게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실 앞에서 카밀라는 도망친다. 진실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사실 중 무엇이 진실일까? 진실을 향한 집념은 카밀라를 한 번 더 진남으로 향하게 한다. 진실을 찾기 위한 남쪽(진남)으로의 여정이 시작된다. 



나, 너, 그리고 우리

소설은 크게 카밀라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나, 지은(카밀라의 엄마)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너, 타인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우리까지 3개의 챕터로 구분된다. 특별전까지 포함하면 4개의 챕터라고도 볼 수 있다.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인 주인공의 이름은 동백꽃을 뜻하는 카멜리아(camellia)에서 붙여졌다. 그녀는 이름이 지어진 과정처럼 처음에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고 엄마와 찍은 사진을 발견한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 

타워 크레인 위에 올라간 아빠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어둠 속을 뚫고 조선소 사장 집으로 뛰어간 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출산한 일 등을 보면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지은은 자신의 삶에 주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자살로 마감한 불행한 삶이지만 심연 속에서 딸을 기다리며 정지은의 삶은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라고 불리는 친구들(김윤경, 조유진, 김미옥, 서정희)과 신혜숙, 최성식 등 주변 인물들은 나이가 어려서 나약함을 핑계로, 가진 것이 없어서 질투심을 핑계로, 가진 것이 많아서 비겁함을 핑계로 ‘나’와 ‘너’의 진실과 외로움을 외면했다. 시간이 지나 진실을 깨닫게 된 사람도 있고, 진실을 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도 있지만 작가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끝은 열린 채로 끝났다. 



심연과 희망, 그리고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작가 김연수는 소설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밤과 낮’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진 정지은을 묘사했고,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를 인용해 소설의 주제어 중 하나인 날개의 의미를 설명했다. 개개인이 지닌 아득한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 타인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진남 이야기 박물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그렇듯이 온갖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소설 속에서 내가 건져 올린 진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정지은이 카밀라를 낳아서 카밀라가 존재할 수 있다면 이제는 카밀라가 정지은을 생각하면서 정지은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지은의 비밀스러운 사랑 이야기의 끝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진실을 알기 위한 날갯짓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진실은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진실은 단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것

작가의 이 말에 공감한다. 진실은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실 속에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진실도 있고, 온전히 말해질 수 없는 기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달되는 진실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독자가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확신과 정답으로 가득 찬 세계에 갇히지 말라는 작가의 당부의 말 같기도 했다. 이제는 정지은이 누구의 아이를 낳았는지, 카밀라의 아빠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고, 쪽지를 쓴 미옥의 질투심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심연 속으로 빠뜨린 저자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날개를 펼쳐 책 속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작가의 생각을 건져내기에 부족했다. 작가가 펼쳐놓은 그물 속 구멍들이 많아서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작가의 생각을 찾기 위해 한 번 더 읽었다. 그제야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출 수 있었다. 천천히, 낮은 곳으로, 포기하지 않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책을 읽는 것은 나의 일인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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