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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06. 2020

침묵과 공범

일상 이야기

버스는 입구부터 사람으로 꽉 찼다. 다음 버스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은 앞으로 밀고 뒤에서 밀리며 너도나도 버스에 올라타느라 아우성이었다. 체구가 작았던 나는 사람들 사이의 빈 공간을 헤집고 최대한 버스 뒤쪽으로 갔다. 덩치가 큰 아저씨 두 명과 아줌마 한 명이 내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의자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의자 손잡이까지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뭐 괜찮았다. 아줌마와 아저씨 머리 사이로 창밖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오후 햇살은 따뜻했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바라나. 


두 정거장 정도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저씨 한 명이 나를 옆으로 미는 듯했다. 앞쪽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니까 그러겠지 싶어서 한 발 한 발 오른쪽으로 게걸음을 쳤다. 물론 어린 학생을 툭툭 치면서 미는 행동에 짜증이 나긴 했다. 앞에 선 아줌마는 연신 통화를 이어갔다. 한 손은 의자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통화하느라 어깨에 매달린 핸드백은 자꾸 내려왔다. 한쪽 어깨에 대롱거리면서 매달린 가방이 불안해 보였다. 불안한 내 시선과 덩치 큰 아저씨의 손이 맞닥뜨렸다. 핸드백 지퍼를 열고 손지갑을 꺼냈다. 순식간이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목적을 이룬 두 아저씨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아줌마는 그때까지 계속 통화를 이어갔고, 버스에서 내린 아저씨 두 명은 오히려 창문을 올려다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라도 지르면 저 아저씨들이 나를 쫓아올 것 같았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목적지까지 갈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았고, 찍소리도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저 아줌마는 왜 자기 핸드백이 털리는지도 모르고 전화만 줄곧 하는지 멍청해 보였다. 핸드백 지퍼를 여는 순간을 나 말고도 다들 봤을 거라며 핑계 댔다. 죄를 지은 건 핸드백 털이범인데, 온갖 잘못을 주변 상황으로 돌렸다. 그래도 화끈거리는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고, 그 순간을 목격하고 침묵했던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현장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얘기를 들은 친구는 위로는 고사하고 나를 나무랐다. 무서웠겠지만 그래도 말하는 게 맞는 거라고 했다. 본인은 그랬을 거라고도 했다. 나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안다. 교과서에도 적혀 있다. 그런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몸이 굳어버리는 걸 어쩌라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외톨이 검사 황시목은 3년이 지나자 고독한 검사로 변했다. 정의롭고 따뜻한 형사 한여진은 3년이 지나자 행동파 형사로 변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내면을 더 고독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 사람의 외면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이 평탄치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가려고 한다. 두 사람이 변하는 동안 그들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변하지 않았고, 더 황폐해졌다. 더 황폐해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고독하게, 더 강하게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쯤 눈감아줘도 될 일을 크게 벌인다고, 

밥 한 끼 먹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빚만 좀 갚고 남은 여생은 편하게 살고 싶다고, 

자식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는 서포트를 해줘야 한다고,  

그 상황이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나만 그러냐고 세상 사람 다 그런다고, 

어둠의 경로로 종이 한 장 슬쩍 받는 게 뭐 별거라고... 


우리가 알고 했든 혹은 미처 알지 못하고 했든 간에 사소하게 지나친 일은 결국 사건이 되고 침묵을 원하는 자의 힘이 강할수록 범죄는 악랄해진다. 드라마가 주는 울림이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눈감아주고 지나치면 스스로 합리화되면서 뭐든지 해도 되는 면죄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부터 그러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 나 대신 오물을 치워줄 것이라 기다리지 말고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정의가 무엇인지, 법과 규칙이 또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사회 본질과 시스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나를 돌아보게 한다. 잘 만든 드라마다.    

그러나 나는 못하겠다. 입을 벌려 말하지 못하겠고, 손을 들어 가리키지 못하겠고, 장막을 치우고 비밀을 드러내지 못하겠다. 드라마 엔딩 장면에서 긍정과 희망보다 안타까움과 외로움,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그래서인 듯하다. 해도 안 될 것 같다. 굳이 힘든 길을 가지 말라고, 그렇지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리고 싶다. 차라리 그 시간에 맥주 한 캔 더 마시고, 옥상에서 시원한 바람 한번 더 쐬고, 좋은 사람들과 편하게 밥 먹으라고 하고 싶다. 3년의 시간 동안 나도 변했다.   


시즌 1에서 거대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꼈다면, 시즌 2에서는 그 거대한 공권력이 나와는 너무 멀어 보인다. '검'이든 '경'이든 밥그릇 싸움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지치고, 수사권을 누가 갖고 가는지에 대한 관심사는 이미 버스 떠난 일이다. 만나본 적도 없는 재벌들 간의 내부 싸움이 본인과 사투를 벌이는 가짜 사나이들의 생존 싸움보다 재미있을 리 만무하다. 일반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전입신고 확정일자 효력일과 근저당권 효력일의 차이로 사기를 당해 길거리로 나 앉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는 바지 위에 팬티 입는 영웅이 나타나면 좋겠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 속에서 다리가 무너진다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을 맨몸으로 막아서는 평범한 영웅이 더 가까이 있다. 왼쪽 가슴에 금 쪼가리 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더 가까이에서 듣고 있다. 시즌 2는 시즌 1과 같은 맥락에서 거대 담론을 건드리고 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주변 환경이 변하고 있지 않으니 드라마는 3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 3년 전이었다면 더 힘차게 손뼉 치면서 응원해줬을 텐데 지금은 이런 마음이다. 


누군가 나서 준다면 초 치지 말고 응원해야지. 정의는 살아 있으니까.      

     

중학생 때 이후로 내 정의감이 자라는 속도는 손톱이 자라는 속도에 훨씬 못 미친다. 나는 두렵다. 정의감을 불태워 그나마 품고 있는 알량한 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까 봐. 드라마에서 말하는 정의가, 사회에서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이러다가 정의가 사라지고 정의라는 단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런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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