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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29. 2020

어제와 오늘 사이에 엷은 미소가 있다

관계 이야기

참 무뚝뚝하다. 업무적으로 가끔 만나는데, 처음에는 나를 싫어하나 싶었다.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물어볼 일이 있어 찾아가면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얘기한다.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눈빛이 매섭기도 해서 앞에서 말을 할 때 죄지은 것도 없이 움찔거리기도 했다. 을의 입장이라 그런지 누가 뭐라고 윽박지르지 않는대도 스스로 쪼그라든다. 괜히 사람 주눅 들게 만드네.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해서 그를 찾아갈 일이 있었다. 사무실 앞에 섰는데, 하아... 들어가기 싫다. 박신양이 피아노 치며 나를 맞아주면 좋으련만.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제기랄! 로맨틱한 상황이 나한테까지 일어나기에는 박신양이 엄청 바쁜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사무실 안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두 사람 때문에 문고리를 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어정쩡한 내 모습이라니.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준비해 온 서류로는 지원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다른 쪽은 며칠 후면 제품이 유통되니까 지원금을 달라고 뻗댔다. 한두 차례 더 실랑이가 벌어지고 난 뒤 문을 박차고 한 남자가 나왔다. 내 옆 옆 사무실 사람이다. 오고 가면서 인사할 때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씩씩대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있는 대로 열이 뻗친 듯했다. 표정만 봐도 결론을 알 수 있었다. 날짜가 맞지 않아 지원금을 받지 못하겠구나.   

   

하필 이럴 때 들어가야 하다니.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만큼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덩달아 내 얼굴 근육도 딱딱해졌는지, 입꼬리와 눈꼬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서류를 내밀었더니 조금 후에 확인해 보겠다면서 두고 가라고 한다. ‘나라고 여기 있고 싶겠니?’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두고 얌전히 나왔다. 총총총...   

       

사실 따지고 보면 옆 옆 사무실 사람이 흥분할 일은 아니었다. 행정 처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서류에 적힌 대로 날짜를 확인할 수밖에 없으니까. 돈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는 더 꼼꼼하게 체크해야 하는 게 맞지. 그래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너무 빡빡하게 말하니까 감정이 서로 격해진 게 아닐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두 사람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빚을 갚기는커녕 서로 열폭한 건가.   

    

어쨌든 그 사건으로 무뚝뚝한 사람은 깐깐한 사람으로 한 단계 격상되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제출한 서류에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는 것과 그에 대한 앞 사무실 사람의 평판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 나만 삐뚜름하게 본 건 아닐 거야. 사람 보는 눈이야 다들 비슷한 거지 뭐. 대신 앞 사무실 사람은 대화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좀 지나고 보니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노력하더라고요.』    

  

하긴, 이전 담당자보다 좀 더 일을 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심사 조건에 들어있는 세부 사항을 체크해 주기도 하고, 현재 받고 있는 혜택을 연장해서 받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을 일러주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칼 같이 자르면서 업무적으로 말해줘서 탈이었지.


3개월쯤 지났나? 복도에서 만난 그 사람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일은 잘 진행되는지 물어봤다. 뭔 일이야?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 나랑 친해진 거야?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굴러다녔지만 뭐 어떤가. 나한테 친절하면 좋은 사람이지 뭐. 별거 있겠나. 미소라도 띠면서 말을 걸어주니 을의 입장에서는 한결 편해졌다. 돈 안 드는 미소는 맘껏 투척하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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