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이야기
가끔 아파트 근처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노부부가 있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모자를 눌러쓴 할머니의 모습과 다르게, 할아버지는 중풍을 앓으셨는지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으셨다. 그래서인지 노부부는 늘 손을 잡고 걸었다. 퇴근길에 산책을 갔다 오거나 산책을 나가는 모습을 종종 볼 때가 있었는데, 혹시나 할아버지가 넘어질 까 봐 손을 꼭 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느릿느릿 호흡을 맞추면서 걸어가는 두 분의 모습에서 부모님 뒷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언제부터였는지 두 분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는 할머니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모습을 본 지는 꽤 오래된 듯했다. 시원찮은 기억력을 쥐어짜 보니 서너 달은 족히 넘은 듯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할머니에게 불쑥 모자가 잘 어울린다며 말을 걸었다. 하아... 이놈의 오지랖 하고는 여하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니 할머니는 약간 당황한 듯 쳐다보셨다. 나는 할머니를 기억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처음 볼 테니 당연하지. 흉악범으로는 보이지 않았는지 이내 편하게 대답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모자를 즐겨 썼더니 이제는 한 몸같이 느껴져요. 머리는 매일 감아요.』
혹여나 생길 수 있는 의심까지 사전에 차단하셨다. 깔끔한 겉모습만큼 성격도 깔끔하시네. 게다가 센스까지 있는 분이셨어.
묻고 싶은 건 할아버지 안부였지만, 목구멍에서 말이 삐져나오지 않았다. ‘집에 있어요. 거동이 좀 불편해서.’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건만, 오지랖을 부릴 때의 호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입안에서만 맴돈 그 말을 끝내 뱉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내린 할머니의 뒷모습만 오래 쳐다봤다. 짐작하는 그 말이 나올까 봐 두렵기도 했고, 혹시나 할머니가 눈물이라도 왈칵 쏟으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았으니까.
엄마도 그랬다. 걱정해서 건넨 말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고 불편하다며 아무도 말을 안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어보는 사람은 한 번이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하고, 힘든 상황을 계속 떠올려야 하니까. 어느 날은 펑펑 울기도 했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에 엄마는 상처를 받은 것이겠지.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말은 걱정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슬픔에 왕창 소금 뿌리는, 못돼 쳐 먹은 심보를 가진 사람들.
다음에 스쳐 지나가게 되면 모자는 어디서 샀는지 물어봐야겠다. 내가 본 것만도 대여섯 개는 되어 보였으니까. 딱 한 번만 더 오지랖을 피우고 그만둬야지. 두 사람 모두에게 안부 인사를 할 수 없으니 한 사람에게 이 정도 오지랖 인사는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