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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Nov 02. 2020

꿈과 이상은 현실 속에서

일상 이야기

김승옥 작가는 소설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명산물을 안개라고 지칭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무진의 대표 단어가 안개라는 것을 기억하면, 어디 가서 허세 부리며 한 마디 거들 수는 있을 테다. 안개는 소설 속 몽환적 분위기를 설명하는 장치로 자주 쓰이는데, 김승옥 작가 역시 안개에 둘러싸인 무진을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일상을 벗어난 장소로 소개했다. 즉 무진은 소설 속 도시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무진을 현실로 가져다 놓았다. 작가의 고향이 순천이다 보니 무진을 순천과 연관 지었고, 이곳에서는 소설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까지 이루어진다. 뭐, 작가 역시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설레발이라고만 몰아세우지 않아도 될 듯하다.  

           

작가는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을 안개라고 묘사했는데, 책을 읽을 때는 깊게 와 닿지 않다가 오늘 새벽에 이 느낌을 온전히 경험했다. 책에 빠져서, 작가에 대한 동경 때문에, 또는 안개 때문에 무진(또는 순천)까지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늦가을 새벽 6시, 경기도 파주에 들어선 나는 소설 속 무진을 경험했다. 안개로 둘러싸인 파주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죽은 책들의 도시 같은 분위기를 뿜어냈다.  

    

자동차 비상등을 계속 깜빡거리며 굼벵이 걸음 마냥 운전해 갔다. 분명 앞차의 비상등을 쫓아가고 있었는데, 앞차 엉덩이의 붉은 불빛은 안갯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로 위에는 나와 내 차를 둘러싼 안개만 있는 듯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자꾸 나를 끌어당기는 듯해서 고개를 몇 번씩 가로저었다. 이승에 한이 있는 귀신이 부르는 거면 어떡해. 내 몸은 점점 핸들에 가까워지고 믿지도 않았던 온갖 종교와 관련된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바람이 불면 힘없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뜨면 조용히 사라질 안개지만, 바람도 없고 햇빛도 없는 새벽녘 안개는 내게 공포로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중앙선을 침범할 듯하고, 앞차를 제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갈지자 운전을 해서 옆의 가드레일이라도 박을 것 같은 공포 말이다. 버스를 탄 주인공이 보는 안개와 운전을 하는 내가 겪는 안개는 너무나 다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안갯속에서 몽환적인 꿈을 꾸었는데, 나는 식은땀 나는 현실을 헤쳐 나가야 했다. 작가가 안개를 너무 낭만적으로만 포장했네. 

     

안개에 싸인 무진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일상을 벗어난 장소라면, 안개에 싸인 파주는 지극히 냉정하고 현실적이고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온 장소다. 물론 나한테 그렇다는 얘기다. 안갯속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맺을 수도 있고, 안개를 벗어났을 때 찾아오는 현실에 이불 킥 할지도 모르니까. 

     

소설 속 주인공은 무진에서 꿈과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현실에 굴복해 서울로 되돌아가는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했다. 파주에서 꿈과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가는 나는 현실의 벽을 느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고 내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담담하고 뻔뻔하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서 의지를 불끈 세웠다. 소설 속 주인공과 달리 나는 살아가기 바빠서 부끄러움이 끼어들 틈이 없네. 여자 귀신이 쫓아오든 말든 좀 더 힘을 내서 내 갈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들을 꽉 잡았다. 


그래, 뭐 괜찮다. 난 소설가도 아니고,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니까. 순천 사람들이 무진을 현실로 끌어왔듯이 난 지극히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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