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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Feb 13. 2022

엄마의 배추전

   설날에는 눈이 종일 내렸다. 적설량 10센티 넘는 대설이었다. 다음날까지 눈은 이어지다 그쳤고, 기온은 영하 18도까지 뚝 떨어졌다. 미처 치우지 못한 눈은 꽁꽁 얼어붙었다. 설날 부모님 댁에 다녀오려던 계획은 무기한 늦춰졌다.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세 번째 설날. 작년엔 아무도 오지 말라는 아버지 엄명에 일찌감치 방문을 포기했다. 그땐 하루 삼백 명 대였던 확진자 수가 일 년이 지나 삼만 명대에 이르렀다. 사태는 100 배 이상 커졌지만 위기감은 늘지 않았다. 장기간 피로에 감각이 무뎌진 것도 있고, 증상이 약한 변이 바이러스 확산이라는 정보를 믿는 구석도 있었다. 아버지도 이번엔 별말씀이 없었다. 모일 수 있는 제한 인원 6명만 지키면 될 터였다. 언니 네와 남동생 네는 설 연휴기간 부모님 댁에 하루 걸러 각각 다녀갔다. 네 남매 중 가장 멀리 사는 동생과 나는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며 방문 날짜를 조정했다. 설날 이후 눈 예보는 없었지만 지속되는 한파에 길 사정은 좋지 않았다. 기온이 다소 풀리는 날로 정한 게 210일이었다. 출발 하루 전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며칠 사이 확진자 수가 이만이 더 늘어났다. 그 뉴스를 접한 엄마와 아버지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좀 안정되기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10일 아침 햇살이 가득 모인 테라스 파라솔 아래 동생과 앉아 있었다. 모처럼 영상을 회복한 기온. 마당 수풀마다 작은 새들이 햇살처럼 포르르 날아다녔다. 입춘 지났다고 재재거리는 새소리에서 벌써 봄기운이 느껴졌다. 예정대로 출발했으면 거의 부모님 댁에 도착할 시각이었다.

  난 아빠하고 둘만의 비밀이 있어. 중학생 때 아빠가 출근하면서 차로 나를 학교 앞에 내려 줬거든. 그때 아빠가 용돈을 툭하면 줬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하면서.”  

  동생이 말했다. 부모님 댁에 가지 못한 허전함이었는지,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야. 나는 아빠한테 몰래 용돈 받은 적 한 번도 없는데.”  

  나는 좀 심술 난 어조로 말했다.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 왜 그런지 아이로 돌아가게 되어 입까지 부루퉁 내밀게 된다. 어릴 때 우리는 꽤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동생을 빼고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나를 말한다. 집 경제 사정과 상관없이 아이들 부의 척도는 용돈을 얼마나 받느냐에 달려 있다. 애들에게 돈을 만지게 하는 건 교육상 좋지 않다는 엄마의 근거 없는 교육철학에 따라 우리는 거의 용돈을 받지 못했다. 하교 길 문방구점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갈 때 우리는 한눈팔지 않고 집으로 얌전히 돌아오곤 했다.      

  언니는 아빠와 둘만의 비밀 같은 거 없어?”  

 동생이 물었다. 비밀이란 게 있을 게 있나. 아버지는 말이 지나치게 적은 사람이었다. 부녀간에 대화라는 걸 해 본 적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묵한 만큼 좀 어렵게 여겨지던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자상한 면이 많았. 아이들 필통에 늘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 넣어 주었고, 집에 오는 길엔 먹을 걸 자주 사들고 .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 최초 기억은 대여섯 살 정도였다고 생각난다. 그때 업무지가 멀리 타지에 있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오는 날이면 종종 나는 골목을 벗어나 마을 삼거리 커다란 나무 아래에 가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가 집으로 오는 길목이었다. 저만치서 아버지 모습이 보이면 나는 나무  뒤로 재빨리 숨었다. 기다리고 있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수줍음과 숨은 나를 발견해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었다. 채 여물지 않은 그 감정을 에두르고 있는 건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비밀은 모르겠고, 스케이트 가르쳐 주던  나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배운 것이 문득 각나 나는 말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검은색 스케이트 두 켤레를 사 와서 언니와 나를 얼음이 언 동네 개울로 데리고 갔다. 리와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얹게 하여 천천히 한 발씩 떼게 했는데, 언니도 나도 운동신경이 별로인 편이어서 아버지가 꽤 애를 쓰며 가르쳤다. 끈기 있게 스케이트 자세를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던 아버지의 음성. 여자아이들은 거의 빨간색 피겨스케이트를 탔는데, 언니와 나는 검정 롱 스케이트를 그렇게 아버지에게 배웠다.  

  , 또 있다. ‘강물아 흘러 흘러’ 노래 가르쳐 줬던 것.”  

  스케이트에 이어 따라 나온 기억은 노래였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가고 싶어 바다로 간다.’ 아버지에게 직접 배운 유일한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나도 알아. 그 노래. 나는 언니들이 가르쳐 줬잖아. 스케이트도 언니들한테 배웠을 걸.”  

  동생이 말했다. 동생에게 스케이트나 노래를 가르쳐 준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그랬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살 아래인 동생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허구한 날 옷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파마를 한 것처럼 태생적으로 곱슬곱슬한 머리를 하고 있던 동생은 어릴 때부터 좀 웃긴 구석이 있었다. 도무지 몸에 뭔가 걸쳐지는 걸 참지 못해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어디선가 혼자 실컷 놀다 왔다. 내 주요 업무는 그 옷가지를 찾아오는 일이었다.  번은 골목골목을 뒤져 옷가지는 죄다 찾았는데 동생을 찾지 못해 한참 애를 태웠다. 나중에 엄마가 결국 집안에서 찾아냈다. 안방 침대와 벽 사이에 빠져 들어가 그 좁은 틈에서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음식 잔뜩 장만해 놓고 우리가 못 가서 섭섭하겠다. 엄마가 해 주는 잡채랑 오징어 튀김 정말 맛있는데.  

  동생 기억은 이제 엄마에게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딸들 만날 생각에 엄마는 진작부터 음식 장만을 하며 기분을 내었다. “얘 배추 사다가 겉절이 했는데 아주 맛있게 됐어. 잡채 거리도 사다 놨다.” 통화한 다음날이면 또 뭔가 장을 봐왔다고 전화를 했다.  가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엄마와 자주 전화하며 이미 만난 듯 기분을 내었으니 아주 서운하진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 배추전이 먹고 싶어졌다. 엄마의 배추전은 유난히 맛있었다. 배춧잎을 묽은 밀가루 반죽에 풍덩 담갔다가 기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부쳐주던 고소한 배추전. 


  배추전 이틀 뒤 먹게 되었다. 바이러스 사태가 수그러 때까지 산골 집에 꼭꼭 숨어 있으려 했는데 결국 나갈 일이 생겼다. 자동차 정기검사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걸 고 있었다. 가까운 검사소는 차로 50 여분. 기껏 갔더니 차 소음기가 파열됐다고 고친 뒤 검사를 받으라 했다. 차는 소유주인 동생 소관이라 나는 소음기라는 게 차 뒤꽁무니에 달려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소음기를 주문하면 하루 뒤에나 부품이 온다니 이래저래 몇 차례 외출을 피할 수 없었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러 배추 한 통을 사 왔다. 엄마를 흉내 내어 배추 밑동에 칼집을 넣어 반듯하게 편 뒤 맨 손으로 반죽을 묻혔다. 얀 반죽을 뚜르르  흘리며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올려놓았다. 지글지글, 한 번 소환된 유년의 기억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달려 있는지도 몰랐던 소음기의 파열처럼, 남아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파열된 묵음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좋거나 나쁘거나가 아닌, 미열에 가까운 감각들.


  나이 든 뒤 엄마와 아버지를 뵈러 가면 늘 현실의 온도를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 살짝 들뜨게 만드는 미열.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그 알 수 없는 온도에 싸이게 된다. 나간 일들은 복잡하게 연결된 미로 같기도 해서 입구와 출구를 찾다 보면 온갖 것들이 막다른 골목처럼 막아다. 어리고, 젊고, 나이 들어가는 자신이 여전히 그 막다른 곳에서 그 시간을 살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울 것도 그립지 않을 것도 없었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버지 통해 추상의 그리움을 키웠다면 엄마의 음식들로 현실뿌리내든든한 양분을 얻었으니, 두 분이 나를 키운 팔할임은 분명했다. 동생은 언젠가 가족에 대해 '곤장을 대신 맞아줄 수 있는 관계'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우스개로 말한 것이겠지만 동생다운 발상이었다. 여전히 곤장을 대신 맞아 줄 수 있냐고 배추전을 뒤집으며 물어보았다. 이젠 좀 생각해 봐야겠단다. 자기도 이젠 나이 들어 신경통도 있고 이래저래 피부 탄력도 예전 같지 않다나 어쨌다나.

  "아나, 배추전이나 먹어라."

 나는 막 구운 배추전을 접시에 담아 동생에게 내밀었다.

  오! 엄마가 해 주던 배추전하고 똑같네."

  동생이 반갑게 다가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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