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엔 비가 어찌나 심하게 내리던지 무서울 정도였다. 웬만하면 바깥소리가 차단되는 두터운 벽체인데도 우다다 내리 꽂히는 빗소리가 굉장했다. 집이 땅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게 두드려댔다. 다행히 기습적 폭우여서 차츰 물러가는 빗소리 들으며 잠들 수 있었다. 새벽, 날이 밝으며 내다보니 세상은 또 멀쩡하다. 무슨 일 날 것 같이 폭설이 내리고 강풍이 몰아쳐도 세상은 대체로 별 일이 없다. 별 일은 아침마다 열어보는 뉴스 채널에만 가득하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대로인 게, 다행이다 하면서도 다행은 아니다. 온라인으로 접하는 뉴스지만 가상이 아닌, 어디선가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모두 나서서 어떡하든 막아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도 벌어지는데, 내가 나서지 않는 것처럼 모두 생각만 그럴 것이다.
내가 사는, 아직은 그대로인 산골엔 드디어 매화가 피고, 민들레와 제비꽃도 피었다. 조팝나무 가느다란 가지마다 꽃망울도 조르르 맺혔다. 조팝꽃은 논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고 옛이야기에 나온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난 엄마가, 게으른 아들이 제때 농사를 짓지 못해 행여 배를 곯을까 염려하여, 하얀 쌀밥 같은 꽃으로 피어나 농사를 시작하라 알려준다는 이야기다. 조팝꽃에선 그래서 구수한 밥 냄새가 난다.
작년 봄, 울타리에 핀 조팝꽃
이웃 농장 비닐하우스에 가득 핀 냉이꽃
밭농사의 시작은 냉이꽃이 알려준다. 땅에 바짝 붙어 잘 보이지도 않던 냉이가, 꽃대를 길게 세워 밭둑 밭고랑 가득 하얀 꽃으로 시선을 끌면, 밭작물을 심을 때가 된 것이다. 이웃 농장 비닐하우스에도 냉이꽃이 가득 피었다. 기온이 오르면서 쑥쑥 올라와 한들한들 피어난 하얀 꽃무리. 멀리서 보면 안개 서린 것 같고, 가까이 보면 작은 송이마다 갖출 것 다 갖춘 경이로운 생명들이다. 하우스 밭에 미리 냉이 씨를 뿌려 푸르게 키워 놓는 건, 수익성 작물을 심기 전 갈아엎어, 밑거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냉이를 맘껏 캐어 가도 좋다는 농장 주인 말에 꽃이 피기 전 서둘러 냉이를 캐왔다. 더러 꽃이 핀 것도 딸려 왔지만 상관없었다. 냉이는 꽃이 피어도 먹을 수 있다. 그래도 꽃은 따로 모아 눈으로 즐긴다. 꽃을 꺾고 남은 줄기와 뿌리는 잘게 썰어 차를 우려 마시면 좋다. 차 주전자가 아닌 냄비에 넣고 푹푹 끓여 우려야 한다. 칼슘과 단백질, 철분이 풍부하다는 냉이. 그래서인가 진하게 우린 냉이 차는 어째 시원한 조갯국 맛이 난다.
나긋한 잎과 향긋한 뿌리는 깨끗이 씻어 데칠 준비를 한다. 물에 소금 한 술 넣고 팔팔 끓을 때 냉이를 넣는다. 위아래 한 번씩만 뒤집어 준 뒤 바로 꺼낸다. 찬물에 헹궈 재빨리 건져 올리면 냉이의 향을 최대한 가둘 수 있다. 양이 많을 땐 냉동실에 보관하는데 물기를 짜내지 않고 보관해야 향이 오래간다. 나물로 무칠 때도 물기를 너무 꽉 짜면 맛있는 국물을 버리는 것이다. 살살 짜서 먹기 좋게 잘라 소금과 참기름에 버무린다.
데치기 전 냉이와 데친 냉이 나물
냉이로 할 만한 요리는 많다. 냉이 된장찌개, 냉이 볶음밥, 냉이 국수, 냉이 김밥.
냉이 김밥을 해 먹기로 했다. 냉이 김밥 재료는 간단하다. 밥과 냉이와 두부만 있으면 된다. 두부가 없어 이번엔 스트링 치즈를 넣었다. 산골 사는 두 동생 먹을거리를 염려하는 언니는 자주 먹을 걸 택배로 보내온다. 단백질 섭취가 부족할까 싶어 빠지지 않고 보내오는 게 치즈다. 고마운 언니 생각을 하며 김밥을 말았다. 꽃피는 사월, 함께 봄 나무 아래서 향긋한 냉이 김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냉이 김밥과 고추지, 돼지감자 피클
밭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냉이를 맛있게 먹었으니 이제 밭일을 시작해야지. 밭 한 귀퉁이를 호미로 갈았다. 추위에 강한 루꼴라와 배추씨만 우선 뿌리기로 했다. 밭일하느라 허리를 굽히면 작은 생명들이 보인다. 잔잔히 흔들리는 봄풀과 풀 사이로 나오는 작은 벌레들.이것이 진짜 세상이라고 마음이 놓인다. 달맞이. 냉이, 꽃다지, 민들레, 쑥, 달래, 당귀, 아기별꽃. 허리를 굽히면 세상은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