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숲의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나무 Apr 03. 2022

산골의 봄은

   며칠 째 길가에 쌓인 낙엽을 긁어모으고, 사방 우거진 풀덤불 정리를 하고 있다. 텃밭에 뾰족하게 오르는 부추와 마늘 싹에 흙도 북돋워준다. 산과 들에 저절로 나는 것들만 취하겠다고 게으를 궁리를 하면서도, 이런저런 작물을 이리저리 짝 지워 이러저러하게 심어야지, 계획은 저 나름 움이 튼다. 일을 하다 보면 끝이 없는데 손을 놓고 허리를 펴고 보면 또 그다지 긴요한 일은 없다 싶다.        

  "걷고 올까?"       

  누구라도 제안하면      

  " 그래."      

  흔쾌히 응한다.                

  

  올봄엔 다른 일보다 우선하여 실컷 걸어보자고 정했다. 유난히 방랑 기질이 발동된 것인지, 세상 불안이 기저질환처럼 깔려 그에 대한 나름의 처방인지는 모르나, 한 번 정하면 동생도 나도 고집스레 실행하는 편이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서고 있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 정도. 아랫마을로 내려가거나 산마루 도로를 오르거나, 첫 선택은 두 갈래다. 갈래 끝에 이르면 다른 갈래가 기다리고 있다. 익숙한 갈래에 낯선 갈래가 숨어 있기도 하다. 보이지 않았다가 문득 눈에 띈 샛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난 것이기도 했다.    

          

  지대가 높은 산골인데도 어디에선가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거대 곤충 모양새를 한, 땅 파는 기계가 굉음을 울리며 기어 다닌다. 한참 그 지역을 멀리했다가 문득 가보면 생흙을 다진 새로운 길이 나 있기도 했다. 공사는 끝나지 않아 여전히 기계가 기어 다니고, 커다란 돌덩이들은 축대가 되어 쌓여 있었다. 골짜기를 면해 편평히 다진 공간엔 그새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새로 들어섰다. 납작한 회색 돌로 이 층 높이 벽을 세우고 검은 기와로 지붕을  얹었는데, 껑충한 모양새가 관공서 같기도 하고, 국도변 휴게소 같기도 했다. 절인가도 싶지만 절 치고는 속세스러웠다. 아직 손질 중으로 보이는 마당엔 너럭바위가 놓였는데, 그 위에 갈색 진돗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주춤 걸음이 멈춰졌다. 언제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동요하지 않는 점잖은 녀석이었다. 대문 없이 트인 마당 앞을 과연 지나갈 수 있을까. 동생도 나도 담력이라곤 도통 없다. 산골길을 걷다 외딴집에서 강아지라도 캉캉 짖으며 달려 나오면 가슴이 뛴다. 길을 되돌아서기도 한다. 잠시 팽팽히 시선이 오가는 중 녀석은 몸을 일으켜 컹컹 묵직하게 짖기 시작했다. 

  "괜찮아. 꼬리 흔드는 걸 보면 호의적이야."   

  동생이 말했다.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겨 그 앞을 통과했다. 그날 이후 몇 번 더 지나친 뒤로 녀석은 우리를 보고 더 이상 짖지 않게 되었다.   

  "기다렸니?"  

  이젠 지나가며 말도 걸어 본다. 정작 정이 든 건 우리다. 녀석을 보고 싶어 자주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젠 우리를 꽤 반긴다. 애칭도 지었다. 고담이.


  맑은 봄날이 이어지고 있다. 산골의 아침은 아직 서리가 돋지만 한낮 볕은 따끈따끈. 햇볕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오후엔 사방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물가에 핀 머위꽃, 도톰한 꽃다지 어린잎, 보송보송 애기똥풀, 불그레한 달맞이꽃 어린잎, 싱그러운 미나리냉이, 뾰족 뾰족 오르는 환삼덩굴 싹. 모두 어째 그리 씻은 듯 말쑥한지.  

 , 그 냉이 같이 생긴 나물 그게 뭐더라?”                                                  어제는 도시에 사는 엄마 전화물었다.

  냉이 은 거? 꽃다지?” 

  아냐. 냉이 같이 생겼는데 좀 큰 거. 그게 요새 우리 아파트에 잔뜩 돋았어. 하얀 뿌리가 어찌나 길고 탐스러운지 몰라.  

  엄마. 그런 거 함부로 드시면 안 돼.” 

  말려도 소용없을 걸 안다. 이미 뽑아 왔을 거였다. 나물  이야기를 할 때면  시절을 떠올리며 목소리까지 향긋하니 젊어지는 엄마다. 코비드 세상이 되기 전엔 나물 뜯으러 이곳 산골에 꼭 한 차례 다녀가셨건만.    

  여긴 아직 화단에 약 안 쳐서 괜찮아. 재미로 조금만 뜯어 왔어. 가 지나가다가 그게 뭐냐고 묻는데, 가물가물 도통 생각안 나 거야.”   

 냉이 닮았는데  크다는 거지? 그럼 황새냉이인가.”  

 , 맞다  황새냉이. 그거야."

  뿌리에 약성이 많다고 황새냉이를 오래전 내게 알려줬던 엄마. 이젠 내게 나물 이름을 묻. 보다는 독이 더 많을 수 있다다시금 말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삶아서 찬물에 한참 우리는 중이니 괜찮다고 했다. 약을 치지 않아도 배기가스며 시멘트에서 나온 중금속에 오염되었을 거라는 말도 하나마.  

  그럼 오래 우린 뒤 꼭 짜서 맛만 조금 보셔. 봄 기분 낼 정도로만.”      


꽃다지와 냉이
달맞이꽃 어린잎과 당귀잎
햇볕을 좋아하는 양지꽃


  엄마가 사는 곳엔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피었다는데 산골의 봄은 천천히 오는 중이다. 제비꽃도 민들레도 아직 피지 않았다. 껏 물이 오른 나무들도 이제 겨우 자잘한 눈을 틔우고 있다. 올봄엔 심은 지 오 년 되는 마당 매실나무가 처음으로 꽃망울을 맺었다. 마당에 나갈 때면 살피게 된다. 늘은 꽃이 피었을까.




아직은 생강나무꽃만 한창이다. 생강나무꽃이 질 때에야 진달래가 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