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길가에 쌓인 낙엽을 긁어모으고, 사방우거진 풀덤불 정리를 하고 있다. 텃밭에 뾰족하게 오르는 부추와 마늘 싹에 흙도 북돋워준다. 산과 들에 저절로 나는 것들만 취하겠다고 게으를 궁리를 하면서도, 이런저런 작물을 이리저리 짝 지워 이러저러하게 심어야지, 계획은 저 나름 움이 튼다. 일을 하다 보면 끝이 없는데 손을 놓고 허리를 펴고 보면 또 그다지 긴요한 일은 없다 싶다.
"걷고 올까?"
누구라도 제안하면
" 그래."
흔쾌히 응한다.
올봄엔 다른 일보다 우선하여 실컷 걸어보자고 정했다. 유난히 방랑 기질이 발동된 것인지, 세상 불안이 기저질환처럼 깔려 그에 대한 나름의 처방인지는 모르나, 한 번 정하면 동생도 나도 고집스레 실행하는 편이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서고 있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 정도. 아랫마을로 내려가거나 산마루 도로를 오르거나,첫 선택은 두 갈래다. 갈래 끝에 이르면 다른 갈래가 기다리고 있다. 익숙한 갈래에 낯선 갈래가 숨어 있기도 하다. 보이지 않았다가 문득 눈에 띈 샛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난 것이기도 했다.
지대가 높은 산골인데도 어디에선가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거대 곤충 모양새를 한, 땅 파는 기계가 굉음을 울리며 기어 다닌다. 한참 그 지역을 멀리했다가 문득 가보면 생흙을 다진 새로운 길이 나 있기도 했다. 공사는 끝나지 않아 여전히 기계가 기어 다니고, 커다란 돌덩이들은 축대가 되어 쌓여 있었다. 골짜기를 면해 편평히 다진 공간엔 그새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새로 들어섰다. 납작한 회색 돌로 이 층 높이 벽을 세우고 검은 기와로 지붕을 얹었는데, 껑충한 모양새가 관공서 같기도 하고, 국도변 휴게소 같기도 했다. 절인가도 싶지만 절 치고는 속세스러웠다. 아직 손질 중으로 보이는 마당엔 너럭바위가 놓였는데, 그 위에 갈색 진돗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주춤 걸음이 멈춰졌다. 언제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동요하지 않는 점잖은 녀석이었다. 대문 없이 트인 마당 앞을 과연 지나갈 수 있을까. 동생도 나도 담력이라곤 도통 없다. 산골길을 걷다 외딴집에서 강아지라도 캉캉 짖으며 달려 나오면 가슴이 뛴다. 길을 되돌아서기도 한다. 잠시 팽팽히 시선이 오가는 중 녀석은 몸을 일으켜 컹컹 묵직하게 짖기 시작했다.
"괜찮아. 꼬리 흔드는 걸 보면 호의적이야."
동생이 말했다.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겨 그 앞을 통과했다. 그날 이후 몇 번 더 지나친 뒤로 녀석은 우리를 보고 더 이상 짖지 않게 되었다.
"기다렸니?"
이젠 지나가며 말도 걸어 본다. 정작 정이 든 건 우리다. 녀석을 보고 싶어 자주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젠 우리를 꽤 반긴다. 애칭도 지었다. 고담이.
맑은 봄날이 이어지고 있다. 산골의 아침은 아직 서리가 돋지만 한낮 볕은 따끈따끈. 햇볕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오후엔 사방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물가에 핀 머위꽃, 도톰한 꽃다지 어린잎, 보송보송 애기똥풀, 불그레한 달맞이꽃 어린잎, 싱그러운 미나리냉이, 뾰족 뾰족 오르는 환삼덩굴 싹. 모두 어째 그리 씻은 듯 말쑥한지.
“얘, 그 냉이 같이 생긴 나물 그게 뭐더라?”어제는 도시에 사는 엄마가 전화로 물었다.
“냉이 같은 거? 꽃다지?”
“아냐.왜 냉이 같이 생겼는데 좀 큰 거.그게 요새 우리 아파트에 잔뜩 돋았어. 하얀뿌리가 어찌나 길고 탐스러운지 몰라.”
“엄마. 그런 거 함부로 드시면 안 돼.”
말려도 소용없을 걸 안다. 이미 뽑아 왔을 거였다. 나물 캐는 이야기를 할 때면 옛 시절을 떠올리며 목소리까지 향긋하니 젊어지는 엄마다. 코비드 세상이 되기 전엔 봄나물 뜯으러 이곳 산골에 꼭 한 차례는 다녀가셨건만.
“여긴 아직 화단에 약 안 쳐서 괜찮아. 재미로 조금만 뜯어 왔어. 누가 지나가다가 그게 뭐냐고 묻는데,가물가물 도통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냉이 닮았는데 더 크다는 거지? 그럼 황새냉이인가.”
“아, 그래 맞다 황새냉이. 그거야."
뿌리에 약성이 많다고 황새냉이를 오래전 내게 알려줬던 엄마. 이젠 내게 나물 이름을 묻는다. 약성보다는 독이 더 많을 수 있다고 다시금 말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삶아서 찬물에 한참 우리는 중이니 괜찮다고 했다.약을 치지 않아도 배기가스며 시멘트에서 나온 중금속에 오염되었을 거라는 말도 하나마나다.
“그럼 오래 우린 뒤 꼭 짜서 맛만 조금 보셔. 봄 기분 낼 정도로만.”
꽃다지와 냉이
달맞이꽃 어린잎과 당귀잎
햇볕을 좋아하는 양지꽃
엄마가 사는 곳엔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피었다는데 산골의 봄은 천천히 오는 중이다. 제비꽃도 민들레도 아직 피지 않았다. 한껏 물이 오른 나무들도 이제 겨우 자잘한 눈을 틔우고 있다. 올봄엔 심은 지 오 년 되는 마당 매실나무가 처음으로 꽃망울을 맺었다. 마당에 나갈 때면 살피게 된다. 오늘은 꽃이 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