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복숭아꽃이 만개한 날, 산골 세 여자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딸은 평소보다 일찍 깨느라 바쁘고, 동생은 긴 외출에 대비해 집 안팎 고양이들 점심까지 미리 챙기느라 바빴다. 가장 바쁜 건 물론 나였다. 소풍의 진정한 즐거움인 도시락 담당이었으니. 하루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어 이미 소풍을 나선 기분이기도 했다. 김밥 재료 손질은 물론, 좀처럼 쓸 일 없던 3단 도시락과 돗자리에 소풍 바구니까지 찾아내어 깨끗이 닦아 놓았다. 3단 도시락 통은 산골에 온 뒤로 처음 꺼내 보았다.
"와, 이거 정말 오랜만에 본다."
딸이 도시락 통을 보고 말했다. 자기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때 쓰기 위해 내가 구입한 거라고,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딸 초등학교 졸업 이후론 3단까지 도시락 쌀 일이 없었으니 그 뒤로 처음인 건가. 십여 년 만에 꺼낸 것 치고는 너무나 말짱해서 설마 싶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제대로 작정하여 소풍 가는 것도 딸이 성장한 뒤로 처음인가 싶으니.
소풍 갈 생각은 딸이 오기 하루 전날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꾸준히삶을 꾸려가는 딸. 휴일이 따로 없는 생활을 벗어나 봄철이면 일주일 정도 산골에 다녀갔지만 한 번도 소풍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숲길을 산책하고, 나물거리를 함께 뜯고,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밀린 이야기를 실컷 나누는 것만으로도 꽉 차서, 다른 계획이 끼어들 틈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소풍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즐거운 그 발상은 '빨간 머리 앤' 덕분이었다. 오래 닫아 두었던 딸 방의 먼지를 털다 책장에서 꺼내게 된 「빨간 머리 앤」. 무심코 책을 펼치다 내처 읽게 되어, 침구를 새로 깔아 놓은 딸 침대에 올라앉아'초록 지붕 집' 이야기에 아주 오랜만에 빠져들었다. 딸이 어릴 때 가장 좋아한 책이었고, 엄마인 내겐 어떤 훌륭한 육아 지침서보다 도움이 된 책이었다. 밤에 아이를 재울 때도 아침에 깨울 때도, 아이 머리맡에서 책 읽어 주기를 즐기던 그 시기, 가장 자주 읽어준 책이기도 했다. 아이는 그 기억을 어린 시절 행복했던 일 중 하나로 꼽아 지금까지도 집에 오면 종종 자기 전이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책 읽어주기를 청했다.
*「빨간 머리 앤」, 2002년 시공주니어 출판.
"아, 다음 주 수요일에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 때문에 소풍을 못 가게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견뎌 내야겠지만 그 일은 분명 평생의 슬픔이 될 거예요. 나중에 소풍을 백 번 간다 해도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이번에 못 간 소풍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고아원에서 자라 한 번도 소풍을 가본 적 없던 앤은 초록 지붕 집 아이가 되어 처음으로 마을 소풍을 앞두고 엄청난 기쁨에 휩싸인다. 한 주일 내내 앤은 소풍 얘기를 하고 소풍 생각을 하고 소풍 가는 꿈까지 꾸었다. 지나치게 들뜬 앤에게 마릴라가 자중할 것을 요구하자 앤은 말한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루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미리 생각해 보는 건 자유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소풍을 가자는 생각은 이 대목을 읽다 떠올랐다. 생각과 동시에 이미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고, 이마를 스치는 상쾌한 바람과 바람에 흩어지는 꽃잎들의 환상이 어른댔다. 평소 숲에 둘러싸여 살았으니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물가를 검색해 아주 근사한 곳을 찾아냈다. 신선이 머문다고 알려진 계곡이었다. 계곡 위 출렁다리를 건너가면 물길을 따라 생태 숲길이 이어진다고 했다. 차로 이십 분이면 갈 수 있는가까운 곳인데도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오, 범상치가 않고만."
어느새 내 집에 건너온 동생은 접시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색색가지 김밥 재료를 보고 감탄했다.
"기대해. 최고로 맛있는 김밥을 싸줄게."
나는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맛있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우엉이 있는 것이다. 우엉 들어간 김밥이 맛없기는 어렵다.달짝지근한 간장 양념에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조려낸 우엉채가 보기만 해도 맛깔스러웠다.마늘종은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소금 톡톡 뿌려 구웠고, 당근은 채칼로 얇게 벗겨 살짝 숨만 죽게 볶았다. 녹두 단백질로 만든연노랑 지단도 프라이팬에폭신하게 구웠고,겨울무로 만든 집 단무지는 물기를 꼭꼭 짜 꼬들꼬들하게 준비했다. 파래가 적당히 섞인 생김은 초록빛이돌게 프라이팬에 앞뒤로 살짝 구웠다. 가장 중요한 밥은 맵쌀 3컵에 찹쌀 1컵 비율로 씻어 한 시간 불린 뒤, 다시마 두 장, 소금 반 큰 술,참기름 한 큰 술을 넣어 전기밥통 보통 취사 코스로 했다.
미리 담아 놓은 머위쌈밥과 버섯 채소구이, 과일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김밥을 말아 볼까. 김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반으로 자른 김을 겹쳐 올렸다.김이 많이 들어간 만큼 맛도 더 있고 옆구리 터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아, 나도 이렇게 하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딸이 말했다.
"엄마한테 배웠을 테니 당연하겠지."
동생이 말했다.나는 밥을 둥글게 뭉쳐 김 가운데 올려 골고루 펼치며 얇게 깔았다. 끄트머리 부분은 잘 붙게 밥풀을 톡톡 붙이고 속 재료를 하나씩 올렸다. 이왕이면 색 어울림을 생각해 붉은 당근을 먼저 펼쳐 다른 색들을 감싸게 했다.둘은 옆에서 흥미진진 내 손놀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김과 참기름 향은 환상적인 조합이야."
딸이 말하자,
"소풍의 즐거움은 부엌에서 김밥냄새가 풍길 때부터 고조되는 거야. 도시락을 여는 순간엔 최고조에 이르는 거고."
동생이 말을 받았다.
"소풍이란 말은 참정겨워서 좋아. 풍이 바람 풍이야?"
"그럴 걸. 소는 그럼 뭐지?"
동생 물음이 끝나기도 전, 딸이 폰을 켜 검색을 했다.
"거닐다, 라는 뜻이래."
"그럼 바람 속을 거닐다가 되겠네."
흥겨운 대화를 들으며 나는 김밥을 꼭꼭 눌러 단단하게 말았다. 창 너머 마당엔 진분홍 복숭아꽃이이미 바람 속을 살랑살랑 거닐고 있었다.
"자, 꼬투리."
김밥을 썰어 꼬투리 하나를 먼저 딸애 입에 넣어줬다. 동생은 다음 꼬투리를 받아먹었다. 오물거리며 둘은 엄지척과 하트를 번갈아 날렸다.오, 완벽해. 나는 빨간 머리 앤처럼 생각했다. 앞으로 소풍을 백 번 간다 해도 오늘 소풍이 최고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