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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까치 까치 설날

by 구름나무

한동안 겨울치고 푸근하더니 까치설인 오늘 아침 다시 기온이 내려갔다. 장작난로를 지피기 전 실내 온도는 영상11도. 바깥 온도는 영하 8도.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밖은 또 온통 하얀 눈의 세상이 되었다. 나는 어쩌자고 눈이 푹푹 내려 쌓이는 이런 계절을 좋아하는 걸까.


몇 시간 만에 눈이 이렇게나 쌓이고...다시 눈이...


"거기도 눈 내리지? 지금 여기 눈이 많이 오는데 내리면서 녹지 길에 쌓이진 않아."

어제 도시 아파트에 사는 엄마가 전화로 눈 소식을 전해왔을 때,

"여긴 계속 쌓이고 있어요. 전까지 치우다 들어왔는데 20센티는 온 것 같아. 이틀 더 내린다니 엄청나겠어요."

나는 말했다. 겨울이면 허구한 날 눈이 오는 강원 산골에서 눈은 자랑거리 비슷한 것이 되었다. 눈 치우느라 리 애를 쓰면서도.

"그럼 설엔 못 오겠네."

엄마는 말했다.

"… 그렇죠."

나는 의아해져 대답했다. 이 아니더라도 이번 명절 가지 못한다는 건 진작에 말씀드렸다. 지난 12월 초 몸에 병증이 생긴 뒤로 외출은 삼가고 있었다. 이제는 많이 회복되어 일상생활엔 무리가 없지만 명절 모임에 갈 정도는 되지 못했다. 엄마 기억력이 더 약해진 건지, 알면서도 그냥 서운해서 해 본 말씀인지.

"따뜻해지면 갈게요. 한 달만 지나면 봄이잖아."

나는 말했다.

"그래 설 지나면 금방 봄이지. 그래도 멀게 느껴진다."

엄마의 쓸쓸한 어조에 좀 찡해져서 나는 아이 같은 말투가 되었다.

"봄에 가면 나는 엄마랑 같이 자야."

"그럴까. 우리 다 같이 마루에 이불 깔고 그럼."

엄마 목소리가 밝아져 다행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어디서 저 많은 눈이 하염없이 오는 걸까. 하얀 입자들이 가득한 허공.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내리고 내리고 내려, 쌓이고 쌓였다. 보고 있으면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의 슬픔처럼 그랬다. 다음날인 오늘, 이 밝기 전 잠에서 깨어난 어둠 속에서도 그 하얀 입자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마당 눈 치우고...


동생은 마당 아래 비탈길 눈 치우고...


가만가만 귀를 기울였다. 가 올 땐 빗소리가 나는데 눈은 소리를 지운다. 색도 지운다. 눈 내리는 세상은 오직 하얗고 고요하다. 일어나 환하게 불을 켜고 장작난로를 지폈다. 오직 하얗고 고요한 아침엔 김이 오르는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지. 설날에 먹으려고 준비해 둔 떡국떡을 한 줌 덜어냈다. 열기가 작난로엔 배기를 올려놓았다. 배기가 달궈지자 감자와 마늘을 채 썰어 넣고 참기름에 볶았다. 간은 굵은소금 두어 꼬집. 물을 부어 팔팔 끓을 때 하얀 엽전 같은 떡을 주르륵 넣었다. 자로 둥글게 저어주자 단단했던 떡이 이내 말랑해지며 따라왔다. 국물이 뽀얗게 변해가고 떡이 부풀어 오르는 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리 내지 않고도 나는 곧잘 노래를 부른다.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내일이래요." 오래전부터 설날이면 으레 방송국에서 틀어주던 노래. 릴 땐 이 노래가 들려야 명절 기분이 났다. 슬쩍 바꿔치기한 노랫말을 바로 잡자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동요 <설날> 중-


어린 마음에 까치 설날 다음날이 우리 설날이라는 노랫말이 좋았다. 우리 설날 다음 날은 또 누구 설날일까 괜히 궁금해하며. 고양이나 염소도 그렇게 자기들 만의 설날이 있어, 일 년 365일 날마다 누군가의 설날일 듯한 노래.


까치설의 까치가 새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건, 한참 나이 들어 알았다. 까치설은 작은설이라는 말로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믐날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옛말로는 '아치설'인데 작다라는 뜻 '아치'가 어감 비슷한 '까치'로 바뀐 거라는 설명이다. 쉽게 수긍이 가는 건 아니었고, 까치가 새를 뜻하지 않는 건 아쉬웠다. 어릴 때부터 알던 대로 그냥 까치의 설날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라서. 사실 노랫말에 '까치'와 '우리'를 대비한 것을 보아서는 작다는 뜻의 까치가 아닌 그냥 까치로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설을 맞아 곳에서 고향을 찾아올, 반가운 이 소식을 알려주는 까치기도 하니까.


궁금해져서 창작자를 찾아보았다. <설날>은 윤극영 선생이 1924년에 작사 작곡 노래였다. 우리나라 첫 창작동요인 <반달>을 만든 분이기도 했다. <반달>이라면 바로 그 손바닥 마주치며 '세세세' 하던 노래 아니던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1903~1988) 작사•작곡 -


그 밖에도 고드름, 따오기, 기찻길옆, 고기잡이, 어린이날 노래 등 어린 시절을 보내며 누구나 듣고 르던 정감 있는 노래를 많이 만든 분이었다. 나도 어릴 때 수없이 불렀던 노래들인데, 그냥 세상에 있는 노래라고만 생각했다. 사람의 삶 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슬프고도 맑고 정서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고 있다. 금도 상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고 있는 듯 여겨지지만 선생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의 혼란과 불안에는 감히 견줄 수 없을 것이다.


떡국이 충분히 끓었다. 난로에서 내리기 전 잘게 자른 파와 김을 뿌렸다. 맛을 표현하자면 얗고 따뜻한 맛. 다 맛의 영역은 아니지만 눈 내리는 까치설날엔 하얗고 따뜻한 것이 가장 맛있으니까.



새해 모두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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