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겨울은 우물에 열선 코드를 꽂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새벽 최저 기온 영하 8도, 이제 우물에 열선을 꽂아야 할 때가 되었다. 두툼한 은박 보온재인 테크론을 넉넉히 잘라 우물로 내려갔다. 우물은 집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비탈길 아래에 있다. 집을 지을 때 주변 여러 곳을 뚫어도 물이 나오지 않아 부득이 비탈 아래 우물을 놓게 되었다.
우물 쇠뚜껑을 열었다. 산골에서 여러 해째 맞는 겨울이라 우물 속 계량기와 물 호스에 열선은 이미 감겨 있다. 우물 안 둥근 시멘트 벽에도 은박 보온재를 둘러놓았다. 보온을 철저히 해놓지 않으면 계량기며 호스의 물이 얼어 집 마당 물탱크로 올라오지 않았다. 새로 할 일은 열선의 전기 코드를 꽂고 은박 보온재를 여러 겹 우물 위에 덮으면 되는 것이었다. 두툼한 보온재 위에 무거운 쇠뚜껑을 얹어 놓으면 틈이 없어 보온 효과가 좋았다. 작업을 마치고 남은 보온재와 칼, 가위 같은 도구를 정리해 돌아섰다.
“어, 저게 뭐야?”
뒤따라오던 동생이 말했다. 우물 맞은편 밭에 누런 호박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깊은 골이 파이도록 커다랗게 잘 늙은 청둥호박이었다. 무성하던 풀덤불이 영하의 날씨에 주저앉자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얼지 않았을까? 나는 풀숲에 다가갔다. 호박은 특히 추위에 약해 영하로 떨어지면 잎도 열매도 곧바로 볼품없이 변했다. 풀숲의 호박은 멀쩡해 보였다.
“워낙 크게 자라 괜찮을지도 몰라. 가위 줘 봐.”
동생에게 가위를 건네받아 꼭지를 자르고 호박을 들어내려 했다. 호박은 꿈적도 않았다.
“비껴봐.”
동생이 다가왔다. 동생은 며칠 째 몸살기가 있어 끙끙대는 처지였다. 우물 뚜껑을 나 혼자 열 수 없어 데리고는 왔지만 찬바람에 동생이 나와 있는 게 마음 쓰였다.
“겉은 이래도 속은 얼었을 거야.”
나는 호박을 포기할 참으로 말했다. 새벽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 꽤 되었으니 사실 호박이 멀쩡하기도 어려웠다.
“아냐, 단단한 걸 보니 괜찮아. 비껴, 내가 들고 갈게.”
호박을 탁탁 두드려본 동생이 있는 힘껏 호박을 밀어 길까지 굴려 나왔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 동생이 호박죽 먹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다. 나도 힘을 보태 둥글넓적한 호박을 둘이 마주 잡고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몇 걸음 걷다 쉬고, 또 몇 걸음 옮기다 주저앉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우물에 내려갔다가 느닷없이 호박이 생기고 그걸 옮기고 있다니. 무슨 옛이야기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옛날 어느 산골에 의좋은 자매가 살았더란다. 동생은 말랐지만 강단이 있고, 언니는 마음도 몸도 무른 편이었지. 어느 날 동생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단다. 웬만한 병은 다 낫는다는 쑥을 진하게 달여 먹고, 계피와 생강도 끓여 먹었지만 동생 병은 쉬 낫지를 않았지. 너를 어찌할까, 뭘 먹이면 낫겠느냐. 언니가 한탄을 하니 동생이 말했어. “언니 내가 달빛처럼 고운 호박죽 한 사발만 먹으면 몸이 가쁜 해 질 것 같소.” 그 해엔 비가 많아 호박 농사가 아주 망했단다. 잘 자라던 호박들이 다 녹아버려 가을걷이에 건질 게 하나도 없었지. 어디 가서 호박을 구한다, 근심하던 차에 하루는 풀숲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단다. 아이고, 이게 웬 호박이요, 자매는 무척 기뻐했어. “얘, 저 산 너머 흥부네는 제비 다리 고쳐주고 온갖 보물을 얻었다는데, 너는 고양이 다리를 고쳐주어 이 귀한 호박을 얻게 되었나 보다.” 언니가 말했지. 둘은 조심조심 호박을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어. 몇 걸음 걷다 쉬고, 몇 걸음 걷다 쉬고. “이보우 언니, 안 되겠소. 무슨 수를 내야지. 이래서야 어디 집까지 가겠소.” 동생이 먼저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렸지. “그럼, 여기다 가마를 태울까.” 언니가 꾀를 내었어. 우물에 씌우려고 가져갔던 은박 보온재가 마침 보자기 크기로 남아 있었거든. 그 위에 호박을 얹었더니 그럴듯했지. 은색 보자기에 자리를 잡자 황금색 호박도 대왕 같은 위엄을 갖추었단다. 은가마를 양쪽에서 붙잡고 자매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 한결 수월해져 산 위의 집까지 무사히 비탈길을 올랐단다.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도, 뭉실뭉실 새하얀 구름도 가마 탄 호박님을 웃으며 내려다보았지.
오후엔 올 겨울 처음으로 장작 난로를 피웠다. 오랜만에 타닥거리는 나무 타는 소리, 물 끓어오르는 소리에 귀가 기울어졌다. 불을 피우고 있으면 잊었던 감각들이 살아났다. 마른 장작의 냄새며 질감, 차가운 무릎에 순식간 끼쳐 오르는 열기.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호박과 장작의 붉은빛. 세상에 불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생각은 사라지고 단순해졌다. 불만 바라보게 된다. 따뜻함에 몸이 풀리고, 구수한 냄새에 마음도 훈훈해진다. 난로 위에 냄비 세 개를 올려놓았다. 냄비 속 호박과 밥이 익어가는 동안 가까이 의자를 놓고 앉아 연신 주황빛 호박을 오려냈다. 익은 호박은 대접에 부어놓고, 새로 자른 호박을 또 냄비에 넣어 몇 차례 호박을 끓였다.
호박을 뭉근히 끓여 놓으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호박죽, 호박 수제비, 호박전, 호박빵, 호박 쿠키. 호박죽은 난로 위에서 제일 먼저 끓여 냈다. 푹 익은 호박에 밥 몇 술 넣어 되직하게 끓인 뒤 참기름을 치고 소금 약간으로 간을 했다. 동생이 먹고 싶다던 호박죽이었다. 매콤한 배추 겉절이와 곁들여 동생에게 갖다 주었다. 따끈한 호박죽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동생이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면 싶었다. 마당 어미 고양이 율무가 다리를 다친 뒤부터 너무 오래도록 동생은 애를 써왔다. 어미와 떨어진 새끼 고양이들까지 잘못될까봐 모두 한 방에 들여 보살피고 있으니 병이 날만 했다. 다음날은 발효시킨 반죽으로 호박빵을 구웠다. 남은 반죽으론 호떡과 쿠키도 구웠다. 그러고도 호박이 남아 냉동실 가득 저장해 놓았다. 그야말로 어디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 같았다.
덕분에 산골 밥상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행복한 빛깔이다. 행복이란 말을 쉽게 쓰지 못했다. 말에 경계를 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기운이 남아 돌 때나 하는 모양이다. 이젠 좀 쉽게 행복해지려 한다. 동생과 함께 우물 뚜껑을 열 때도, 비탈길 따라 호박을 옮겨올 때도 행복했노라. 추운 날 불을 피워 따스해지는 것도,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온이 훌쩍 내려가고 날은 흐리다. 곧 첫눈이라도 오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