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너를 잊었을까
아, 토마토를 그동안 잊고 있었다. 텃밭에서 막바지 토마토를 따 놓은 지 열흘이 넘었다. 상태를 보아 다른 일보단 토마토부터 처리해야 했다. 풀이 엉킨 뒷마당을 정리해 창고까지 길을 터놓고, 하우스 비닐을 사러 읍내에도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일단 미루었다.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난주부터 겨울채비로 바빴다. 한가로운 산골생활 같지만 날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쌓이고 겹친다. 며칠에 걸쳐 장작 들여놓을 비닐 차고를 치우고 묵은 장작은 햇볕방으로 옮겼다. 그 사이 단풍 구경도 놓칠 수 없어 짬을 내어 숲길을 걸었다. 며칠 전엔 오래도록 보지 못한 가족들까지 만나고 왔다. 올해 이월 설날에 잠시 만나고는 처음이었다.
남동생이 주말농장으로 지니고 있는 밭이 마침 중간 지점이라 그곳에서 짧은 모임을 가졌다. 참가 인원은 엄마와 언니, 남동생, 나, 여동생 해서 모두 다섯. 명목은 돼지감자 캐기였다. 실내는 위험해, 라는 생각으로 오가지 못했는데 밭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스크를 낀 채 돼지감자를 수확하고 언니가 싸온 김밥도 먹고 야외 카페에서 잠시 즐기다 돌아왔다. 오가는데 세 시간, 그곳에서 머문 게 세 시간 해서 총 여섯 시간의 외출이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해 정을 나누었다지만 역시 돌아오는 길엔 아릿해졌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웃고 즐긴 여파에 아릿함까지 해서 그날은 집에 돌아와 다른 것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돼지감자를 정리해 야채실에 넣으려다 토마토가 들어앉은 걸 발견했다.
마음이 급하면 일이 재미가 없다. 지금은 오직 너밖에 없어, 라는 자세를 갖추었다. 단풍도 가족도 마당일도 다 물러나 토마토와 나만 남았다. 어찌 너를 잊었을까, 애틋했다. 장마와 태풍이 이어진 올해 텃밭에서 비를 고스란히 맞은 토마토는 여름이 지나면서 거의 전멸이었다. 흉해서 모두 잘라낼까 했는데 부지런한 인간은 아니어서 생각만 하다 말았다. 게으름 덕에 살아남은 토마토가 다시 넝쿨을 뻗어 새로 열매를 달고 가을 햇살에 붉어졌으니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지. 으음, 그런 심정일 때의 나는 뾰족한 검정 모자를 쓰고 매부리코로 변신하는 기분이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들, 하며 헨젤과 그레텔을 유혹하는 마녀처럼 토마토를 다정히 쓰다듬고 있는 내 꼴을 상상해 보라. 한동안 열심히 먹고 남은 것이라 양은 많지 않았다. 두 병 남짓 나올 양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토마토 병조림을 스무 병은 넘게 만들었다. 올해 텃밭 사정으론 그나마 두 병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홀토마토 만드는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칼집을 십자로 내거나 따로 껍질을 벗기지는 않는다. 토마토 밑동만 조금 도려내어 냄비에 담아 끓인다. 토마토는 익으면서 수분이 가득 나온다. 껍질은 훌러덩 벗겨진다. 월계수잎을 넉넉히 넣고 좀 더 끓이다 껍질과 함께 걷어낸다. 펄펄 끓는 토마토를 유리병에 담고는 재빨리 병뚜껑을 닫는다. 토마토가 식으면서 공기가 빠져나가 병뚜껑이 살짝 내려앉으면 홀토마토 병조림 완성이다. 생각보다 멸균 상태가 오래도록 유지되어 일 년 넘게 보관해도 멀쩡하다.
토마토를 씻고 밑동을 잘라 냄비에 끓여 병에 담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입에도 간간이 집어넣으며 토마토 색과 향을 실컷 음미할 수 있어 즐거운 작업이다. 병을 소독하는 과정 없이 늘 그냥 끓는 토마토를 병에 담았는데도 보관하면서 상한 적은 없었다. 걱정된다면 끓는 물로 병을 잠시 헹궈주면 된다. 포인트는 끓고 있는 중에 병에 가득 담아 재빨리 뚜껑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병조림을 정리하고 마늘과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았다. 소금만 약간 치고 냄비에 남은 토마토를 넣어 토마토소스를 만들었다. 밥에 얹으면 토마토 덮밥, 피자 도우에 얹으면 토마토 피자, 파스타에 버무리면 토마토 파스타가 된다. 이번엔 움푹한 그릇에 밥을 담고 완성된 토마토소스를 듬뿍 채웠다. 나는 담백한 맛을 즐겨 그대로 먹고 동생 몫에는 치즈를 올렸다. 토마토 덮밥.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오르는 메뉴다. 산골 살이 치곤 그리 생산적이라 할 수 없는 생활인데 먹을거리가 이렇게 풍족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토마토 덮밥 한 그릇으로 따뜻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다시 일할 기분이 났다. 겨울 채비, 모두 잘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