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에 단풍 들었네

우메보시 김밥

by 구름나무

자주 전화 통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나와 성향이 비슷해 마당 있는 집에서 텃밭을 일구고 걷기를 즐기는 친구다. 요즘 우리 통화의 주된 대화는 걸으면서 본 풍경과 느낌에 관한 것이다. 어제 친구는 집에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자라섬이라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왔다 했다.

“오, 나도 어제 올 가을 처음 도시락 싸서 오랜만에 좀 길게 걷고 왔는데.”

따끈한 커피를 보온병에 넣고 샌드위치 싸서 길을 나섰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말했다.

“언제쯤 나섰어?”

친구가 물어 아침 열 시경 출발했다고 하자 어머, 하며 친구가 반겼다. 자신도 그때쯤 나섰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같이 걸은 거네. 혼자 보는 게 안타까운 풍경이라 그렇잖아도 너 생각났는데.”

“하하 나도 그랬어. 너 생각 안 할 수가 없는 게 너가 준 매실 절임으로 김밥 싸서 나갔거든. 그거 넣었더니 김밥에도 단풍 든 거 같더라.”

20201031_110348.jpg 친구가 보내준 매실 절임

친구가 준 매실 절임은 우메보시라고 알려진 일본식 절임이라 색이 가을 숲처럼 붉다. 붉은색을 내는 차조기잎을 잔뜩 짓이겨 넣어 그렇다고 했다. 친구는 해마다 그 매실 절임을 직접 담그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본에서 몇 년 살아본 동생을 놀라게 했다. 일본에서 먹은 우메보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동생이 일본 유학 시절 자주 해 먹었던 것이 바로 우메보시 김밥이었다고 했다. 내 집에 누가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동생이 가끔 그 언니 언제 와? 하고 묻는 속셈엔 우메보시가 있다. 한 해에 한두 번 이곳에 올 때마다 온갖 물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친구가 빠뜨리지 않고 가져오는 게 그 매실 절임이었다.

우메보시 김밥만큼은 자신이 내게 전수해 줬다고 말하는 동생 레시피는 밥과 김과 우메보시, 세 가지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요리다. 나는 거기에 단무지나 치즈, 달걀지단 정도를 기분에 따라 추가하기도 했다.


20201031_111148.jpg 김밥 한 줄에 매실 절임 하나가 들어간다
20201031_114130.jpg 매실 절임 김밥 두 줄 싸서 동생과 나들이를 다녀왔다


“은행나무도 이젠 제대로 물들어 환해지더라.”

친구가 말했다.

“여기 은행나무는 거의 잎이 떨어져 바닥에 노랗게 내려앉았어. 이젠 낙엽송 계절이야. 산마다 투명한 주황빛으로 촛불 켠 듯 밝아지고 있어.”

“아, 그래 낙엽송은 꼭 불 켠 듯이 물이 들더라.”


촛불 켠 듯 타오른다는 낙엽송에 대한 표현을 나는 좋아해서 해마다 이맘때면 하게 되는데 친구는 늘 처음인 듯 응대해 주었다. 나뭇잎이 새처럼 날아간다는 것이며, 낙엽송 바늘잎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더라는 표현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아름다운 계절 속을 걸었다는 걸로 흥이 나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길게 지껄였다. 이십 년 넘은 오래된 친구와의 교감이었다. 연한 주황빛으로 가득 무리 진 물가의 갈대와 홍시 같은 잎들이며 바람이 불 때마다 색들이 모아지고 흩어지던 것에 대해 내가 말하면, 자라섬엔 가을꽃들이 가득 피었고, 물가의 나무들이 물 위에 비쳐 고요히 흔들리더라고 친구가 말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다. 벨기에에서 오래 살다 온 친구는 한국에 돌아와 일찌감치 번역 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를 한창 키울 때 번역물을 우리말로 다듬는 윤문과 교정 일거리를 어렵잖게 맡아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온대. 기온도 많이 떨어져 다음 주부턴 꽤 추워질 건가 봐.”

“계절을 바꾸는 비겠네. 비 내리고 나면 겨울이 섞여들겠어.”

“그래. 벌써 밤엔 그런 걸. 차단기 내려지듯 갑자기 기온이 툭 떨어지는 것도 싫진 않아. 춥다가 전기장판 깐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잠도 쉽게 오고.”

내가 말했다.

“삼일 연속 걸었더니 잠이 잘 오더라. 걷는 동안 햇볕을 충분히 받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나 봐.”

잘 걷고 잘 자고 잘 먹고, 그거 이상은 없다는 걸로 친구와의 통화는 끝을 맺었다. 사는 일에 대해 그 이상은 나눌 말이 없다. 서로 기운을 빼는 세상 소식은 되도록 피한다. 새벽어둠 속에 눈을 뜰 때면 막막하지 않냐는 그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도 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사방이 막힌 생의 테두리야 벗어날 길 없다. 창이 밝아오면서 그런 생각은 달처럼 지고 해가 뜬다. 사물이 색을 찾으면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다. 가을은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라지만, 시선이란 건 밝은 쪽을 향하기 마련이라 내 시선은 번번이 창 밖의 숲으로 향한다. 어제의 매실 김밥처럼 고운, 아직은 가을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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