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보시 김밥
자주 전화 통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나와 성향이 비슷해 마당 있는 집에서 텃밭을 일구고 걷기를 즐기는 친구다. 요즘 우리 통화의 주된 대화는 걸으면서 본 풍경과 느낌에 관한 것이다. 어제 친구는 집에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자라섬이라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왔다 했다.
“오, 나도 어제 올 가을 처음 도시락 싸서 오랜만에 좀 길게 걷고 왔는데.”
따끈한 커피를 보온병에 넣고 샌드위치 싸서 길을 나섰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말했다.
“언제쯤 나섰어?”
친구가 물어 아침 열 시경 출발했다고 하자 어머, 하며 친구가 반겼다. 자신도 그때쯤 나섰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같이 걸은 거네. 혼자 보는 게 안타까운 풍경이라 그렇잖아도 너 생각났는데.”
“하하 나도 그랬어. 너 생각 안 할 수가 없는 게 너가 준 매실 절임으로 김밥 싸서 나갔거든. 그거 넣었더니 김밥에도 단풍 든 거 같더라.”
친구가 준 매실 절임은 우메보시라고 알려진 일본식 절임이라 색이 가을 숲처럼 붉다. 붉은색을 내는 차조기잎을 잔뜩 짓이겨 넣어 그렇다고 했다. 친구는 해마다 그 매실 절임을 직접 담그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본에서 몇 년 살아본 동생을 놀라게 했다. 일본에서 먹은 우메보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동생이 일본 유학 시절 자주 해 먹었던 것이 바로 우메보시 김밥이었다고 했다. 내 집에 누가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동생이 가끔 그 언니 언제 와? 하고 묻는 속셈엔 우메보시가 있다. 한 해에 한두 번 이곳에 올 때마다 온갖 물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친구가 빠뜨리지 않고 가져오는 게 그 매실 절임이었다.
우메보시 김밥만큼은 자신이 내게 전수해 줬다고 말하는 동생 레시피는 밥과 김과 우메보시, 세 가지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요리다. 나는 거기에 단무지나 치즈, 달걀지단 정도를 기분에 따라 추가하기도 했다.
“은행나무도 이젠 제대로 물들어 환해지더라.”
친구가 말했다.
“여기 은행나무는 거의 잎이 떨어져 바닥에 노랗게 내려앉았어. 이젠 낙엽송 계절이야. 산마다 투명한 주황빛으로 촛불 켠 듯 밝아지고 있어.”
“아, 그래 낙엽송은 꼭 불 켠 듯이 물이 들더라.”
촛불 켠 듯 타오른다는 낙엽송에 대한 표현을 나는 좋아해서 해마다 이맘때면 하게 되는데 친구는 늘 처음인 듯 응대해 주었다. 나뭇잎이 새처럼 날아간다는 것이며, 낙엽송 바늘잎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더라는 표현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아름다운 계절 속을 걸었다는 걸로 흥이 나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길게 지껄였다. 이십 년 넘은 오래된 친구와의 교감이었다. 연한 주황빛으로 가득 무리 진 물가의 갈대와 홍시 같은 잎들이며 바람이 불 때마다 색들이 모아지고 흩어지던 것에 대해 내가 말하면, 자라섬엔 가을꽃들이 가득 피었고, 물가의 나무들이 물 위에 비쳐 고요히 흔들리더라고 친구가 말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다. 벨기에에서 오래 살다 온 친구는 한국에 돌아와 일찌감치 번역 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를 한창 키울 때 번역물을 우리말로 다듬는 윤문과 교정 일거리를 어렵잖게 맡아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온대. 기온도 많이 떨어져 다음 주부턴 꽤 추워질 건가 봐.”
“계절을 바꾸는 비겠네. 비 내리고 나면 겨울이 섞여들겠어.”
“그래. 벌써 밤엔 그런 걸. 차단기 내려지듯 갑자기 기온이 툭 떨어지는 것도 싫진 않아. 춥다가 전기장판 깐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잠도 쉽게 오고.”
내가 말했다.
“삼일 연속 걸었더니 잠이 잘 오더라. 걷는 동안 햇볕을 충분히 받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나 봐.”
잘 걷고 잘 자고 잘 먹고, 그거 이상은 없다는 걸로 친구와의 통화는 끝을 맺었다. 사는 일에 대해 그 이상은 나눌 말이 없다. 서로 기운을 빼는 세상 소식은 되도록 피한다. 새벽어둠 속에 눈을 뜰 때면 막막하지 않냐는 그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도 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사방이 막힌 생의 테두리야 벗어날 길 없다. 창이 밝아오면서 그런 생각은 달처럼 지고 해가 뜬다. 사물이 색을 찾으면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다. 가을은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라지만, 시선이란 건 밝은 쪽을 향하기 마련이라 내 시선은 번번이 창 밖의 숲으로 향한다. 어제의 매실 김밥처럼 고운, 아직은 가을이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