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물었다, 어떤 차를 드릴까요?

by 구름나무

어둑해지는 하늘에서 오랜만에 달을 보았다. 지배적인 힘을 내비치는 해와 달리, 달은 어쩐지 그윽하여 인정스러움이 느껴진다. 추워지는 밤하늘, 누가 우리를 위해 불을 켜놓았나 싶다. 다정함에 기대는 마음이 달에 비친 것일까. 보름이 가까워 둥글게 차오르는 달이었다. 달은 가을이란 계절과 닮은 듯도 하다. 숨어 있던 빛을 길어 조금씩 부풀어 오르다, 숨이 가쁘다 싶은 절정의 순간엔 이미 비워지고 있다. 가득 차면 비워지고 그것으로 다시 차오르는, 세상의 운행이 모두 그러한데 매번 새로 알게 된 듯 감동이 이는 건 또 뭔가. 인위적인 것으론 따라갈 수 없는 자연의 힘이란 그런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 안을 채우고 비우는 일도 달에 비추듯 바라보게 된다. 주체에서 비껴나 옆에서 구경하는 마음이다. 오늘은 이 여자가 무얼 하려나, 싶다. 오늘 아침엔 종일 창가에서 따끈한 차나 홀짝이고 싶었다. 미루어 놓은 것이야 많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날은 흐리고 바람도 제법 불고 있었다. 나뭇잎 날아가는 광경만 보고 있어도 좋을 하루였다. 별일 없는 아침의 한가로움은 그러나 이내 휘저어지고 말았다. 느닷없이 밖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마당에 나가보았다. 소리는 마당 맞은편 산 아래 도라지 밭에서 나고 있었다. 600평 정도의 밭을 천천히 파헤치며 일정한 속도로 움직여가는 트랙터가 보였다. 밭 언저리엔 두 남자가 서서 트랙터의 진행을 보고 있었다. 좀 더 살펴보려다 추위를 못 견뎌 실내로 돌아왔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가는 동안 마음이 점점 복잡해졌다. 상황은 아직 모르지만 아무래도 도라지여인에게 연락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도라지여인은 열흘 전인가 찾아와 그 밭을 좀 지켜봐 달라 부탁을 하고 간 사람이다.


저녁 무렵이었다. 마당까지 올라오는 차 소리에 긴장하여 부엌 창으로 내다보니 검은색 지프가 마당 입구에 와서 멈추었다. 운전석에서 여인이 내려서더니 건너편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창을 열어 말을 건넸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실례합니다. 잠깐 물어볼 게 있어요.”

여인이 창을 향해 돌아보더니 말했다. 체구가 크고 목소리가 걸걸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겉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둑해질 무렵 외딴집에 찾아온 낯선 존재에 경계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오시게 하고.”

여인은 마당 입구를 벗어나 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육십 초반의 나이로 보였다.

“마을 분인가요?”

혹시 마을에 새로 온 사람인가 싶어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여인은 좀 전에 서 있던 마당 입구로 다시 가더니 맞은편 산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도라지를 심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 저 밭주인이세요?”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비탈길을 오가며 늘 바라보던 밭이었다. 그곳 주인이라니 아주 낯선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인접해 있는 땅이라 해도 외지인의 소유가 많아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밭은 한동안 콩밭이었다가 작년부터 여름엔 보라색 흰색 도라지꽃을 가득 피웠다.

“밭주인은 아니에요. 주인한테 밭을 빌린 사람에게서 임대를 했어요. 내가 작년에 도라지를 심었거든요. 그러니까 도라지 주인이죠.”

여인이 말했다. 해가 기울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여인은 건너편 밭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어깨를 싸안고 추운 기색을 보였다. 소용없었다. 밭주인은 만난 적 없고 임대한 사람과는 이 년 계약을 했다, 구두로 계약 연장을 약속받았는데 그 사이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해 소유권 문제가 생겼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왜 내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몇 년 전에 위암 수술을 했거든요."라는 말이 불쑥 여인에게서 나올 때까지 나는 얼른 이 이상한 상황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사이에 끼어 넣은 여인은 이제 자신이 귀농을 하기 위해 몇 년째 준비 중이라는 것과 친환경 농사를 지향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나는 말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섣부른 위로는 못하겠고 따뜻한 차 한 잔 정도는 권하고 싶었다.

“아유, 이런 고마울 데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하며 집안으로 따라오는 여인을 보자 얼마간 또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으니 무슨 차를 대접하면 좋을까 판단도 서지 않았다. 물을 끓이며 생각나는 대로 차 몇 가지를 꺼내 놓았다. 쑥차, 비단풀차, 산국차. 여인은 산국차를 택했다. 대추야자와 호두를 곁들여 산국차를 앞에 놓아주었다. 그 사이 여인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60년생이고 귀농 단체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품앗이로 여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과 귀농 본부가 있는 지역에 반 거주를 하며 오간다고도 했다. 가족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잠자코 차만 거듭 우려 따라 주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리고 싶다며 여인은 찻잔과 내 부엌 풍경을 몇 장 찍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니 여인의 도라지밭에 대해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었다. 위치 노출을 아주 꺼린다는 것과 지역은 물론 도라지밭 근처라는 것도 알리지 말아 달라 약속받고 수락을 했다. 사진을 찍고 난 여인은 내게 명함을 주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안한 기색으로 부탁을 했다. 도라지 밭에 사람이 오가거나 밭을 갈아엎거나 하면 꼭 연락 바란다는 거였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오래 시간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가고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슈퍼도라지(약도라지) 씨앗 판매>라 적혀 있고 이름과 전화번호가 밑에 새겨져 있었다.


“전화는 싫고 문자를 보낼까?”

아침 커피를 마시러 온 동생과 상의해 보았다.

“문자가 낫겠네. 근데 그 사람 좀 이상해. 왜 그런 부탁을 해서 내내 신경 쓰게 하는 거야.”

창에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동생이 말했다. 트랙터 소리만 들려올 뿐 창으로는 산 아래 밭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라지여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

<좀 전부터 트랙터가 와서 밭을 파헤치고 있어요. 그 뒤를 따르며 두 남자가 부대자루를 들고 뭔가 주워 담는 것 같고요. 멀어서 자세한 건 안 보이지만 도라지를 수확하는 것 같아요.>

“부탁할 데가 달리 없었겠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동생에게 대답했다.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도라지여인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커피 한 모금도 예사로이 못 마시는 내가 문제였다. 이제 문자를 보냈으니 답신이 올지 전화가 올지, 그때까지 모든 게 보류되어 창가와 마당만 오가게 될 것이었다.

“아는 게 많은 사람이더라. 내게 고추장아찌와 쪽파김치 담는 비법도 알려주고 갔어.”

물을 다시 끓이며 나는 말했다.

“비법?”

“응. 잘게 자르는 게 좋대. 그리고 매실액을 부어 단맛을 먼저 배게 하래.”

고추도 쪽파도 잘게 자르고 매실액을 잠기게 부어둔 뒤 하루를 두었다 다른 양념을 하라, 가 비법이었다. 그러면 단맛이 먼저 배어 덜 짜게 먹을 수 있고 맛도 월등히 좋다고 하였다. 소화도 잘 되고 익힐 필요 없이 다음날부터 바로 먹을 수 있다고도 했다.

“못 봤나. 왜 연락이 없지?”

나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위나라 사람이 괜한 일은 맡아가지고 그래.”

동생이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했다.

“기나라 사람이겠지. 위나라는 조조 아들인가가 세운 나라고.”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 동생이었다.

“아, 기나란가?”

동생도 헤헤 웃었다. 굳었던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기우. 쓸데없는 걱정이란 뜻으로, 옛날 기나라에 사는 사람이 걱정이 많아 늘 땅이 꺼질까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에 싸여 살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매사 근심 많은 내가 스스로도 싫어 ‘난 기나라 사람인가 봐’라고 가끔 푸념을 했다. 동생은 내가 들려준 말을 용케 기억해 곧잘 써먹는데 보통 이런 식이다.

“문자 보냈으니 언니는 할 만큼 한 거야. 잊어버리고 커피나 마셔.”

동생이 내 컵을 비우고 다시 내린 커피를 채워 갖다 주며 말했다.

“난 그 사람을 만났잖아. 이미 아는 사람이 됐는데 그게 되니? 한번 아는 고양이가 되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저는 더하면서.”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은 심각한 일이라는 걸 동생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동생과 도시의 아파트에 살 때 ‘아는 개구리’ 사건이 있었다. 아파트 가까운 산자락에 무슨 회사 연수원이 있어 휴일이면 우리는 곧잘 그곳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오래된 건물과 작은 운동장이 있고 건물 뒤 산책로는 산으로 이어진 고적한 곳이었다. 한번은 그 연수원 수영장에서 개구리를 보았다. 수영장은 늘 물이 없는 상태였는데 그땐 엄청난 비가 이틀 정도 내린 뒤라 빗물이 제법 차 있었다. 그 빗물에 나뭇잎 몇 장과 개구리 한 마리가 떠 있었다. 쟤가 저 미끈한 벽을 올라올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설마 개구린데 벽 타고 올라오는 것쯤은 할 수 있겠지. 동생이 말했다. 다음날 또 우리는 그곳까지 산책을 갔다. 개구리는 여전히 빗물에 떠 있었다. 움직임이 둔해진 것도 같았다. 각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통화 끝에 다시 만나 연수원으로 갔다. 나는 긴 커튼봉에 양파망을 매단 구조봉까지 나름 갖추었다. 개구리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 뒤로 ‘아는 존재’란 무서운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되도록 그런 관계는 만들지 말자 하지만 쉽진 않았다. 산골에 와서 엮이게 된 아는 고양이들이 도대체 몇 마리인가 말이다. 그 아는 고양이 중 두 마리는 동생과 함께 살고 있고, 마당에 자리 잡았던 네 녀석은 어미의 부상으로 지금 동생네 작은 방에 모두 몰아넣어져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럼 내내 그러고 계시든가.”

커피를 홀짝이며 아몬드 몇 알을 오독 깨물던 동생은 자기 집으로 냉큼 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전화기를 톡톡 쳐 내가 보낸 문자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멈추지 않는 트랙터 소리가 마음을 타게 했다. 저러다 다 갈아버리고 도라지가 몽땅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문자보단 전화를 할 걸 그랬다. 여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 걸걸하던 목소리와 얼굴이 어른댔다. 개수대와 세면대의 물 넘침 구멍은 반드시 은박테이프로 막으라는 말도 생각났다. 그 역시 그날 여인이 알려준 것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온갖 구멍을 막아야 찬 공기도 벌레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다시 마당에 가서 비탈길 너머를 내다보았다. 거의 끄트머리에 가 있던 트랙터는 내가 보고 있는 중에 멈췄다. 트랙터를 운전했던 사람까지 내려 이젠 세 남자가 밭을 걸어 다니며 부대자루에 도라지로 짐작되는 것을 주워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열심히 도라지를 심은 여자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여인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들어왔다. 전화기를 켰을 때 막 문자가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밤부터 아침까지 소리를 무음 모드로 자동 설정해 놓은 걸 깜박하고 있었다.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저는 요즘 서울에 와 있고 남편과 아들 둘을 보내 도라지 수확을 해 오라고 했습니다. 삼 년 정도 묵혀 약성을 키우고 싶었는데 얼른 마무리하고 그 밭은 이제 잊어버리려고요. 그날 마신 차 향기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아이고, 한시름 덜어지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남편도 있고 든든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구나. 그런 중요한 얘기를 그때 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나. 이제 마음 놓고 커피나 마저 마실까, 하니 또 그새 식어 있었다. 다시 버튼을 눌러 물을 끓였다. 커피는 이제 됐고 차 마실 생각이 났다.

생강꽃차, 비단풀차, 산국차. 쑥꽃차.

도라지여인에게 그랬듯 생각나는 차를 주르륵 꺼내 놓았다. 해마다 꽃차를 만들게 된다. 봄엔 생강나무꽃과 아까시꽃, 가을엔 쑥꽃과 산국. 주로 그런 종류로 차를 만들었다. 꽃차는 마실 때의 정취도 좋지만 만드는 과정이 더 좋다. 꽃을 따고 꽃송이들을 손질하는 동안 오감에 꽃물이 드는 느낌이다. 손질을 마친 꽃은 찜통에 올려 아주 잠깐 3분 정도 증기를 쬐게 한 뒤 건조기나 채반에 널어 말린다. 말리는 동안은 또 집안에 향이 넘쳐 내내 차를 흠뻑 마시는 기분이 든다.

물이 끓었다. 지난밤 보았던 달에게 권하듯 나는 물었다.

자, 어떤 차를 드릴까요?

20201026_105927.jpg 도라지여인에게 대접한 산국차, 호두, 대추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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