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생일에 오지 말라는 엄마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말은 없고 모자 두 개를 찍은 사진만 도착했다. 곧 전화벨이 울렸다. ‘바다나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모두 나무 애칭을 붙여 놓았다. 엄마는 우리 생명이 나온 곳이라 바다나무, 언니는 우리 집 태양이라 해나무, 남동생은 우리 집 언덕이라 언덕나무. 아버지는 그냥 아빠나무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내 아이 같은 취향에 대해 가족들은 다소 겸연쩍어하면서도 맞춰주는 편이다. 가끔 자기 이름을 잊어 물어온다. 내가 강이냐 바다냐?
“얘 내가 모자 뜬 거 봤니?”
바다 엄마가 물었다.
“지금 막 보냈잖아. 보다가 전화받은 거야.”
내가 말했다.
“이쁘지? 너도 그렇게 떠서 쓰라고.”
“뭐야, 난 또 우리 주려고 보여주는 줄 알았네.”
“헤헤, 자랑하려고 보여준 거지. 너도 잘 뜨잖아.”
엄마가 말했다. 책 읽다가 심심해서 뜨개질을 했다고 한다. 뜨개질과 책은 비교적 젊은 시절 엄마의 취미였다. 문화생활이 풍족한 시대를 지나면서 엄마는 바빠졌다. 우리 가족 중 가장 사교에 능하고 새로운 문물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엄마였다.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늘 무얼 배우러 다니고 모임으로 바쁘더니 올해 은둔의 세상이 되자 다시 예전의 취미를 찾게 되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카톡 화면으로 들어가 모자 구경을 했다. 이번 모자는 동생과 내게 아주 어울릴 것 같았다. 달라고 하면 주겠지만 비슷하게 뜬 모자가 내게도 있다. 모자에 붙인 상표가 보였다. 오래전 내가 동대문 라벨 가게에서 만든 상표였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엄마는 자신이 만든 소품에 그걸 즐겨 붙였다. 우분투.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라는 뜻이다. 남아프리카의 공존 사상을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옷을 만들어 팔던 시절 옷에 붙인 상표이자 상호였다. 하하 웃음이 나도록 어이없는 내 과거다. 한때 나는 옷 디자이너였고 동생은 모델이었다.
산골에 오기 전 옷을 만들어 파는 일을 잠시 했다. 전문 지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자본금이 거의 들지 않는 사업을 고민하다 벌인 일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자로 등록을 하고 일 년 남짓 판매를 했다. 뭘 몰라야 용감해질 수 있다. 곧잘 옷을 만들어 입긴 했지만 그걸 제작해서 판매까지 하는 것은 달랐다. 솜씨 좋은 재봉사를 구하는 일부터 옷 디자인과 재단, 촬영, 편집, 포장, 발송까지 참으로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동생이 쉬는 날 도왔고 대부분은 혼자 했다. 동대문 원단가게를 돌며 원하는 천을 찾아 사 오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고단하고 바빴지만 대체로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다. 생각한 대로 옷이 나오면 신기했고, 동생에게 입혀 코디를 하고 촬영을 할 땐 표현의 맛에 빠져들었다. 쇼핑몰에 올릴 사진을 골라 문구를 넣어가며 편집할 땐 시간을 잊고 몰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 일과 옷을 만드는 일은 참 많이 닮았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떠올라 주어야 글이 시작되듯, 옷도 만들고 싶은 형태가 머릿속에 맴돌아야 디자인이 나왔다. 그 형태에 맞게 옷의 색이나 질감을 고르는 것은 글감에 따라 문체를 정하는 일과 같았다. 또한 기본 틀을 세우고 곁가지를 적절하게 연결하여 마음을 담아내는 것도, 마지막에 탈고를 하고 몇 번인가 수정작업을 거치는 것까지 비슷했다. 옷도 샘플을 뽑고 나면 한동안 눈앞에 걸어두고 계속 바라보며 조금씩 고치고 첨가를 한다. 오래 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재미가 있다 해도 혼자 감당하기엔 일이 너무 많았다. 재단할 때 천에서 나오는 먼지도 참기 힘들었다.
전문적인 배움 없이 내가 옷이란 걸 만들어 팔 수 있었던 건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늘 혼자 궁리해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어냈다. 이불, 커튼, 탁자 보, 피아노 덮개 같은 것들. 언니와 내 옷도 꽤 창의적으로 만들어 입혀 조금 남다른 차림새를 하고 다녔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원피스, 꽃무늬 바지, 체크무늬 망토에 옷마다 세트로 머리띠와 작은 손가방 같은 것도 만들어 주었다. 미적 감각을 타고난 데다 단정한 매무새를 중시하는 엄마였다. 지금도 일어나는 즉시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고 화장부터 한다. 그 손에서 자란 아이들도 얌전하고 단정했다. 나는 긴 머리를 양옆으로 갈라 촘촘히 땋아 내린 뒤 둥글게 올려 고무줄로 묶은 토끼머리를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하고 다녔다. 물까지 묻혀가며 귀 근처까지 어찌나 바짝 올려 묶었는지 눈초리 끝이 올라가 한참 지나야 풀릴 정도였다. 그땐 왜 그렇게 소통 부재였는지 그 토끼머리가 너무나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툭하면 내 뒤에 앉은 남학생이 그 토끼 머리에 손을 넣어 빙빙 돌리며 깡충깡충 뛰어보라 놀려댔던 것을 엄마는 아직도 모를 것이다. 엄마 손을 벗어난 뒤로 내 머리 꼴은 늘 흐트러진 상태다.
“요즘은 뭐 읽어?”
카톡 화면에서 빠져나오며 내가 물었다.
“응, 그거. 뭐더라, 산도적. 아, 임꺽정 읽는 중이야. 확실히 옛날 소설이 읽기 좋아.”
엄마가 대답했다. 얼마 전까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는다더니 그건 끝냈나 보았다. 심심한 걸 못 견디는 양반이다. 성실하고 듬직한 남동생 언덕나무가 열심히 도서관에서 빌려다 드리고 있다.
“그림이 예쁘네. 뜨개질하고 책 읽는 엄마.”
내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예쁘게 봐줘서.”
엄마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근데 이번 모임 어떡하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돌아오는 화요일이 엄마 생신이었다. 그냥 생신이 아니고 팔순이다. 웬만하면 가야겠지만 거리두기가 강화된 지금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뭘 어떡해. 생략해야지.”
엄마가 말했다.
“안 모인다고?”
놀라서 나는 물었다.
“안 할 거야. 그러니 오지 마. 요샌 정말 조심해야 한다잖아. 그래도 큰애랑 막내는 오겠지. 걔네들이야 자기 차로 움직이니 좀 낫잖아. 너희는 시외버스에 지하철 타고 오니까 아무래도 마음 쓰여.”
우리도 차는 있지만 부모님 계신 서울까지 몰고 가진 못한다. 동생 운전 실력이 좀 서툰 대다 오래도록 산골에서 읍내나 다니다 보니 점점 자신을 잃었다. 몇 년 전 서울까지 몰고 가던 중엔 너무 무서워 중간에 차를 멈춰야 했다. 서울 가까이 무슨 신도시에 차를 세우고 택시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이동해 겨우 다녀왔다. 그때 호박 농사가 워낙 잘되어 차에 한가득 청둥호박과 단호박을 싣고 갔기에 잊히질 않는다. 조금이라도 들고 가자고 동생이 우겨 그 무거운 호박을 대여섯 갠가 들고 지하철 긴 통로며 계단을 오르내렸다. 얼마나 힘에 부치던지 집에 가는 거 포기하고 그냥 지하철 바닥에 앉아 호박이나 팔까 싶었다.
“섭섭할 거잖아.”
“아, 물론 섭섭하지. 원래 내 팔순엔 여행 가기로 했잖아. 큰애랑 다 그렇게 약속했다며. 난 정말 그거 하나가 원이었어. 니네들 데리고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며칠 재미나게 지내다 오는 거.”
밝았던 엄마 목소리가 울적해졌다. 왜 아닐까. 자식들 데리고 여행 한 번 다녀오는 게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다. 그걸 이루지 못해 늘 서운해하신다. 내 기억에도 제대로 된 가족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 성향이 그랬다. 집을 떠나는 걸 아주 내키지 않아 하신다. 동생과 내가 산골에 와서 산지 7년인데 그동안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아버지다. 작년 엄마 생신 때도 일박 이일 이야기가 나왔다. 더 나이 들면 운신도 못한다는 엄마의 하소연에 아버지가 웬일로 동의를 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여행지를 물색하고 괜찮은 게스트 하우스까지 알아 놓았다. 그래야 동생도 갈 수 있었다. 돌보는 고양이들이 많아 하룻밤도 내키지 않아 했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돌아오자고 설득을 했다. 그런데 이틀인가 앞두고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져 여행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때 언니와 남동생과 함께 약속을 했다. 다음 해 엄마 팔순엔 정말 만사를 제치고 넉넉히 시간을 내어 여행 계획을 잡자. 그런데 이제 여행은커녕 식당 모임조차도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어떡해. 다 조심해야 빨리 끝나지. 모임 같은 거 안 하면 어때. 요새 정말 힘든 사람들 너무 많다더라.”
엄마가 계속 말했다.
“오구, 우리 엄마 칭찬합니다. 생각이 아주 훌륭하세요.”
내 말에 아유, 얘는 하며 엄마가 웃었다. 오늘따라 이 양반이 왜 이리 사랑스럽나 싶었다. 더 늦기 전 엄마의 소원인 여행은 꼭 이뤄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분위기가 괜찮아지면 즉시 엄마를 보러 가야지, 마음도 먹었다. 백신이며 치료제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 조만간 코로나 19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 급 엄마가 보고 싶어 졌네. 그냥 마스크 쓰고 조심해서 갈까?”
“아냐. 정말 오지 마. 열 명이상 모임은 자제하라잖아. 너네 오면 열두 명이야. 그리고 이번에 우린 고기 먹을 거야. 네 형부가 한우 좋은 거 사 온다 그랬어. 우리 며느리는 회 떠 온다 그러고. 너희 안 오니까 신경 안 쓰고 우리끼리 편하게 먹을 거다.”
엄마가 약 올리듯 말했다. 어라? 고기 안 먹는 우리가 빠져 좋은 점도 있다는 소리다.
“어떻게 세상이 이리되었나 몰라. 그때 언제냐, 참 좋았지. 왜 우리 언니들도 다 오고 사촌 애들도 오고 그랬을 때 너가 시 읽어주고 수수께끼도 내고 그랬잖아. 그날 참 재미있었어, 그치?”
“아, 그때? 벌써 십 년 전이네. 엄마 칠순이라고 다 모인 거였잖아.”
“어마, 그게 내 칠순 때였니? 얘 난 몇 년 전인 줄만 알았다. 무슨 세월이 도둑맞은 거 같니. 우리 언니들도 이젠 너무 늙었어. 내가 가야 볼 수나 있지 그때처럼 못 올거고. 이러다 언제 다시 볼 수나 있을지.”
엄마 목소리가 끝내 쓸쓸해졌다.
통화가 끝나고 나는 책장에 가서 그 시를 찾아보았다. 십 년 전 엄마의 칠순 모임에서 친척들에게 들려준 시. 지금도 자주 들춰보는 백석 시집에 들어 있다. 시 하나 낭송해주면 좋겠네, 엄마의 주문이 있었다. 풍류를 아는 엄마는 가족 모임에서 종종 좋은 글귀를 낭송했다. 그날은 본인이 주인공이라 나를 대신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워도 자주 못 보던 사람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반가이 만난 자리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시였다. 제법 긴 시라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퀴즈를 냈다. 시를 다 듣고 제목을 맞추는 사람에게 상품을 드리겠노라. 상품은 도자기 찻잔 세트로 준비했다. 두 이모님과 그 가족들, 우리 직계 자식들까지 해서 모두 스무 명 조금 넘는 인원이 조용하게 귀 기울여 시를 듣고는 저마다 제목을 맞추느라 떠들썩해졌다. 엉뚱한 제목이 나오면 모두 왁자하니 웃고 떠들었다. 결국 한참만에 대구에서 오신 둘째 이모가 맞추었다. 겨우 찻잔 한 세트를 상품으로 받고도 얼마나 즐거워하셨던가. 그런 시절이 꼭 다시 올 거라 믿는다.
그리운 그 한 때처럼 정겹게 어울려 사는 사람살이의 풍경이 담겨 있는 그 시를 소개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한 번 맞춰보시라고 제목은 안 밝힌다. 하하 검색하지 마시고 그냥 맞춰보시길...
<詩>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