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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김밥!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by 구름나무

잠에서 깨어 물 같은 어스름 속에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물이 찰박이며 내 몸을 얕게 적시고 흐르는 것 같았다. 물속에 오래 떠다닌 나무토막처럼 색도 형태도 닳아 그것이 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흐르는 지엔 이젠 관심이 없나 보다, 생각했다. 얕은 물의 흐름도 가늠할 수 없는데 깊은 물속을 한참이나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짐작만 할 뿐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믿었다. 무언가 있을 것이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그런 매혹적인 의문이 있을 때가 그나마 의지를 가진 한 시기였다. 이젠 인정한다. 이 생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할 수 있는 건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엔 없다. 어디가 끄트머리일까. 여기서 더 갈 곳이나 있나, 싶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릴 때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참 난감했다. 그땐 책을 읽으면 교훈을 찾아내야 하는 교육에 익숙할 때라 뭘 찾아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앞선 애벌레를 따라 계속 조바심을 내며 나아가 애벌레의 탑을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들. 치열하게 경쟁해 탑을 오르지만 탑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에 반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된 애벌레가 있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탑 꼭대기에도 자유롭게 이를 수 있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주위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라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인내의 기간을 거쳐 자유롭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과연 희망이 있나, 어린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까. 조금 다르게 나아간다 해도 결국 이르는 곳엔 아무것도 없다.


사후의 일은 믿지 않는다. 종교를 가져본 적도 없다. 한순간 전원이 나가면 암흑이 되어버리는 스마트 폰의 화면처럼 생명의 끝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도 고치의 한 과정일 수 있다. ‘나’라는 정체성은 벗어나지만 그곳에서 또 다른 생이 발현되고 그 생이 또 다른 변신을 하여 끝없는 생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애벌레와 번데기, 나비를 과연 한 존재로 규명할 수 있을까. 한 존재이든 아니든 그조차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애벌레와 번데기, 나비 이후엔 수많은 미생물, 식물 혹은 동물의 몸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어 계속 변신을 할 것이다. 생이 과연 비극이라면 그 사이클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한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극명히 의식하고 모든 감각을 낱낱이 느낄 수밖에 없는 한 존재의 시기. 무엇을 위한 순환인진 몰라도 꼭 생이 변신을 거듭해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면 정체성 같은 건 주어지지 말았어야 한다.


지난 화요일, 서울 가족들은 모여 엄마의 팔순을 축하했다. 꽃과 케이크, 웃음 가득한 영상을 찍어 보내왔다. 산골에 사는 우리는 일찌감치 방문을 접었다. 코로나 19의 세상에서 우리의 부재는 그리 이상한 일이 되지 않는다. 얼굴을 가리고 은둔하는 일은 이제 미덕이 되었다. 연일 천 명 가까운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손에 잡은 폰 뉴스로 접하고 있다. 올해 초기만 해도 관심 없는 공상 영화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느낌이었다. 올해가 저물고 있는 이제는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이런 현실에서 우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외딴곳에 사는 나와 동생도 마찬가지다. 불안이 우울을 불러온다. 세상 모두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 밀집된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 안위에 대한 현실적 불안, 우리 병증에 대한 구체적인 불안.

계속되는 한파는 다행히? 그런 불안증을 다소 마비시킨다. 최저 영하 18도의 나날. 날짜나 요일에도 무감각해져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동생이 물었을 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폰을 켜서 요일과 날짜를 확인했다. 토요일이구나.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네. 언젠가 이 아무것도 아닌, 날짜나 요일에 감각 없는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늘을 소중하게 여길 마음이 든다. 난로를 피우고 동생과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나날. 꿀마늘로 건강을 챙기고 감자를 폭신하게 삶아 빵을 만들어 먹는 나날. 고맙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온다. 무얼 먹을까, 가 우리 일상의 가장 재미있는 대화다. 다행히 자주 김밥을 먹고 싶어 하는 동생이 있다. 김밥을 말기로 한다. 재료는 당근과 달걀밖에 없다. 눈이 얼어 당분간 차를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제한적 상황을 오히려 즐긴다. 당근과 달걀만 있다면 당근 김밥이지! 두 재료를 두툼히 넣어 당근 김밥을 쌌다.


올 겨울은 어쩐지 눈이 계속 쌓여 고립의 나날이 될 것 같다. 좁은 눈길을 따라 숲 고양이 밥 주러 도로가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바깥에 나갈 일이 없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까. 세기말의 느낌에 싸일 땐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은 날을 오롯이 동생과 둘이서만 지내다 세상의 끝이 올 수도 있겠다. 손바닥에서 세상 소식을 접하다 전원이 끊어지면 완전한 고립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터무니없게 여겨지는 상상도 얼마든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안다. 인간의 머릿속 상상이란 어쩌면 예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원리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면 이 현실은 언젠가 인류가 경험했던 과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상상한다. 이 초록별 지구의 아름다운 세상을. 붉은 당근 김밥과 폭신하고 하얀 감자빵, 따뜻한 곳에 모여든 고양이들

20201217_071748.jpg 당근 김밥 재료: 당근, 달걀, 마늘, 밥, 김, 소금, 참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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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8_075229.jpg 볶은 양파와 삶은 감자로 속을 채운 감자빵. 겉은 코코넛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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