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닷새 남았다. 모두에게 힘들었던 올 한 해. 아직 희망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해가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 믿어야 한다. 되도록 기분 좋게 연말을 보내기로 했다.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연말 기분을 내는 데엔 크리스마스만 한 게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동생이 창에 트리 장식을 했다. 반짝거리고 나풀거리는 것을 고양이들이 가만둘 리 없으니 창 밖에다 줄줄이 반짝이들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때만 상자에서 나오는 오래된 장식들. 이십 년 넘은 거라 불이 안 들어오는 전구도 있다고 동생은 말했다. 애정 어린 말투였다. 지나간 수많은 연말의 기억이 함께 상자에서 꺼내져 깜박이며 불을 밝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에만 불이 켜지는 크리스마스 전구.
크리스마스이브엔 늘 그랬듯 둘만의 홈 파티를 했다. 전에는 우리 집에 음식을 차려 놓고 동생을 초대했는데 작년부터 동생 집에서 하고 있다. 작년엔 도무지 기분이 나지 않아 크리스마스 파티 따윈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동생이 굳이 나를 초대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매운 떡볶이를 해놓을 테니 부디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달라, 그런 문구를 넣어 카드를 보내온 것이다. 초대를 받았으니 할 수 없었다. 급하게 치즈빵을 만들어 건너갔다. 그라탕기에 반죽을 깔고 감자샐러드와 치즈로 속을 채워 오븐에 구운 빵이었다. 냉장고에 마침 발효반죽과 감자샐러드가 있어 즉석으로 만들어본 거였는데 생각보다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졌다. 동생이 식탁에 차려놓은 건 정말 국물 떡볶이 달랑 하나였다. 매운 떡볶이에 고소한 치즈빵, 그 단순한 조합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꽤나 마음에 들어 “이제부터 크리스마스엔 이렇게 하자.” 그렇게 메뉴를 정해 놓았다.
올해도 치즈빵을 만들어 동생네로 건너갔다. 우리 집은 난로가 꺼진 지 오래였지만 동생 집은 오후에 다시 장작을 지펴 아주 훈훈했다. 두 마리 고양이는 평화롭게 늘어져 있고 창가엔 불빛 트리가 반짝거렸다. 분홍색 옷을 입은 동생이 식탁에 촛불을 켜고 하얀 치즈 퐁듀를 끓이고 있었다. 마녀의 음식 같은 빨간 떡볶이도 이미 큰 접시에 가득 담아 놓았다. 떡볶이만큼은 동생이 만들어야 한다. 아주 매운 태국 고추를 잔뜩 갈아 넣어 정신이 번쩍 나게 해 주는 것이다. 깔끔한 게 맛도 꽤 있어 먹다 보면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어스름하던 바깥은 이내 캄캄해졌다.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포도주로 건배를 했다. 올해 텃밭에서 딴 포도로 담근 포도주였다. 해마다 새로 포도주를 담아 연말에 마시고 있다. 나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이라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둘만의 파티지만 구색을 갖춰 선물도 오갔다. 동생은 수면양말을 준비해 놓았다. 언제 마련을 했는지 포근한 파스텔 색 양말이 색색으로 네 켤레나 되었다. 나는 하얀 털실로 뜬 모자를 주었다. 오래전에 뜬 것인데 눈 오는 날 쓰고 싶다고 동생이 탐을 내던 모자였다. 두 번째 건배를 하고 포도주를 한 번에 들이켰더니 취기가 대번에 올랐다. 늘 마시는 시늉만 하다 말았는데 이번엔 어째 보들레르 식의 취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취하라’ 강렬한 그의 시는 유구한 세월 많은 이들의 취기를 부추기고 있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핵심이고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몸을 자빠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포도주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취하기는 했지만 어째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알딸딸해져 추운 내 집으로 돌아오자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성냥을 켜야 나타나는 따뜻한 풍경과 맛있는 식탁.
그 성냥불이 꺼지고 이틀이 지났다. 멀리 있는 가족들과는 전화와 카톡으로 송년 분위기를 함께 하고 있다. 어젯밤엔 딸 고운비와 영상 통화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무얼 했나 물으니 가까운 친구 넷과 줌에서 만나 화상 파티를 했다 한다. 각자 음식을 가져와 화면 앞에 놓고 ‘줌 파티’를 하는 게 요즘 유행이란다.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었다니 마음이 놓였다. 접촉을 피하고 화상으로만 만나는 그런 일들이 이젠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예전의 연말은 어땠는지, 오늘 아침엔 오래전 일기를 들추어보았다. 산골에 집을 막 완성하고 맞은 첫겨울 이맘때의 일기였다.
<다른 날보다 일찍 시작된 아침,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불은 확실히 정화의 기운이 있다. 불을 피우는 것만으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난로 위에서 끓인 누룽지와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었다. 아침 8시의 라디오에서는 ‘몰다우 강’이 흘러나왔다. 체코의 강일뿐 나와는 상관없는 몰다우. 하지만 그 상관없음에 기대어 나의 생애는 마르지 않는 샘이 솟고 새잎을 피운다. 어느 설레던 하루의 기억. 삶을 지속시키는 비밀스러운 힘은 그렇게 상관없음과 상관없음이 만나는 지점의 공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억들이 허공을 받치고 나무를 자라게 하고 바람을 불게 한다. 실제로 바람이 많은 날이다. 날도 흐려 혹시 눈이 오지 않을까 창을 틈틈이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정말 희끗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아침의 허공 속에 연기처럼 눈이 퍼지고 있었다. 보고 있는 사이 눈발이 점점 굵어져 맞은편 산을 배경으로 허공을 하얗게 채웠다. 순식간 변해가는 아름다운 광경에 어쩌지 못하고 수줍어졌다. 날마다 다른 세상, 오늘은 이것으로 되었다.>
그땐 적어도 평온했구나 싶다. 눈 내리는 걸 기다리고 음악에 마음이 움직이고 감각도 젊었다. 하긴 칠 년 전의 나다. 그토록 바라던 산골에 집을 짓고 첫겨울을 맞아 모든 게 감동스러울 때였다. 난로 피우는 것도, 커피를 내려 창가에서 마시는 것도, 꽁꽁 얼어붙는 추위조차도.
그 마음을 빌려 올해를 보내며 새롭게 설레어 보기를 내게 권했다. 특별했던 기억을 꺼내기 좋은 연말이 아닌가. 현재의 자신을 보라, 얼마 전 그런 설법을 유튜브에서 들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나가버린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좋은 기억은 크리스마스 상자의 전구처럼 오래되어도 그 빛이 남아 있다. 불빛이 필요할 때 꺼낼 상자 하나쯤은 간직할 만하다.
모두 아름다운 기억으로 반짝이는 따스한 연말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