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콩 요리 모음
이맘때의 바람은 늘 사납다. 우수를 지나 경칩을 앞둔 시기. 숲 고양이 밥 주러 다녀오는 길에 몇 번이나 모자가 날아갔다. 옷자락이며 머리를 마구 헤집다 못해 발꿈치까지 휘청 들리게 하는 바람의 난리굿. 모자를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급기야 웃음이 터졌다. 왜 그런지 정도가 넘어가는 것엔 웃음이 난다. 간신히 붙잡아 온 모자를 머리에 눌러놓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 묶었다. 꼴이야 우습지만 모자는 써야 했다. 얼얼한 머릿속도 그렇지만 사방 날리는 머리칼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옆에서 걷고 있는 홀쭉한 동생이 날아갈까 걱정스러울 만치 대책 없는 바람이다. 차량 많지 않은 한적한 도로건만 수시로 달려오는 바퀴 소리에 길가로 바짝 붙어서 보면 차 대신 바람이 달려오고 있다. 쑤아아아, 숲의 나무들을 휩쓸면서 거침없이 달려오는 소리. 작은 소형차 소리에서부터 대형 트럭 소리까지 바람의 변주가 심해 번번이 속는다. 골짜기마다 빽빽한 억센 갈대를 결대로 눕히기도 하고, 귀중한 농가의 비닐하우스를 사정없이 찢어놓기도 한다. 제대로 몸을 붙이지 못한 것들은 결국 허공을 향해 신들린 듯 축수를 하고야 만다. 갈대와 비닐이 이기지 못한 바람을 인간은 허술한 두 다리로 맞선다. 지구의 중력에 힘입어 몸을 한껏 웅크리고 단단히 땅을 딛고 가는 영장류엔 바람도 어쩔 수 없다. 무시무시한 효과음을 동반해 광폭하게 굴지만 두 자매는 꿋꿋이 집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탁, 현관문을 닫는 순간 아! 고요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직 이 아늑한 집을 향해 걸어왔다는 감동이 인다.
“뭘 먹을까?”
동생에게 물어보나 마나 비지찌개다. 바람을 실컷 맞고 온 뒤엔 구수한 비지찌개만 한 게 없다. 아무리 거센 바람소리도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정겨운 소리엔 맥을 추지 못한다. 집안엔 매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면 줄곧 그것만 먹어도 좋다는 동생, 덕분에 요즘 식단이 단순해졌다. 하루 두 끼 중 한 끼는 비지찌개다. 비지는 콩을 갈아 콩물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를 일컫는다. 내가 만드는 비지는 그냥 콩을 갈기만 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비지찌개 비슷한 음식이다. 메주콩 비지찌개는 전에도 가끔 해 먹던 것인데 요즘은 병아리콩으로 만든다. 살짝 익혀야 고소한 메주콩과 달리 병아리콩은 푹 삶을 수록 맛있다.
밤맛이 나며 영양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병아리콩. 맛도 좋고 저렴해서 늘 넉넉히 구비해 둔다. 밥 지을 때 한 줌 넣기도 하고 그냥 삶아 간식 삼아 먹기도 한다. 온갖 양념과 잘 어울리기에 다양한 음식에 곁들여 먹어도 좋다. 간장에 조려 콩조림을 할 땐 고추를 듬뿍 썰어 넣는다.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콩조림은 우리 집 단골 밑반찬이다. 떡국이나 미역국 같은 국물 요리에 넣어도 괜찮고, 토마토케첩에 버무리거나 올리브오일을 뿌려 샐러드에 곁들여도 어울린다. 삶은 콩을 갈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먹기 좋게 굳어 고소한 병아리콩 푸딩이 된다. 푸딩으로 그냥 먹어도 좋지만 여러 가지 응용도 가능하다. 국물요리나 물김치에 한두 스푼 넣으면 국물이 진해지고 감칠맛이 난다. 동생이 가장 반기는 푸딩의 용도는 비지찌개다. 뚝배기에 김치를 매큼하게 볶아 갈아놓은 콩을 넣고 끓이면 비지찌개가 된다.
-병아리콩 비지찌개 끓이는 방법-
1. 병아리콩을 씻은 뒤 콩의 두 배 정도 물을 넉넉히 잡아 12시간 이상 충분히 불린다. 불린 콩을 냄비에 넣고 오래 삶는다. *콩은 쉽게 끓어 넘치니 주의를 요합니다. 끓기 시작할 땐 흰 거품이 많이 올라오니 한 번 걷어 내주고, 그 뒤 불을 약하게 한 뒤 뚜껑을 살짝 열어놓고 한 시간 가량 삶아줍니다. 이 과정이 번거롭다면 압력밥솥에 삶으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2. 삶은 콩이 식으면 믹서기에 간다. *콩이 잠길 정도로 물을 넣어 갈면 됩니다. 이때 콩 삶은 물을 사용하는데 물이 적다 싶으면 끓여서 식힌 물을 넣어 줍니다. 약간 묽다 싶게 갈아도 냉장고에 넣어두면 굳어서 푸딩이 됩니다. 푸딩을 영양식으로 그냥 떠먹어도 고소하니 맛있습니다.
3. 뚝배기에 식용유를 두르고 마늘과 홍고추를 볶아 매운 기름을 낸 뒤 잘게 자른 김치를 볶는다. *채 썬 마늘, 다진 마늘 상관없고 홍고추 대신 고춧가루도 괜찮습니다. 단 약한 불에 볶다가 김치를 넣고 난 뒤 불을 키웁니다. 한꺼번에 많이 볶아두었다가 비지찌개 끓일 때마다 사용하면 좋습니다.
4. 볶은 김치를 한 큰 술 뚝배기에 깔고 위에 콩 간 것을 얹어 끓인다. 물과 소금은 적당량 첨가.
병아리콩 비지찌개를 먹을 때마다 동생은 맛있다고 감탄을 한다. 매 끼 먹어도 물리지 않을 기세지만 그럴 순 없다. 양식이 귀한 겨울 끄트머리에 오히려 우리 집 식탁은 먹을 것이 남아돈다. 겨우내 열심히 먹었는데도 냉동실에 저장해 둔 반찬이 반이나 남았다. 모두 텃밭 작물이 풍성할 때 얼려둔 것들이다. 가지나 애호박, 감자 같은 것들은 굽거나 쪄서 얼렸고 두릅, 호박잎, 루꼴라, 바질, 서울배추 같은 잎채소는 살짝 데쳐 얼려두었다. 부추와 고추, 파, 마늘 같이 생으로 얼려도 좋은 것들은 먹기 좋게 잘라 보관했다. 산나물 무침이며 절임, 김치까지도 종류 별로 통에 담아 얼려두었다. 냉장실로 옮겨 하루 정도 천천히 녹인 뒤 먹으면 제철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채소 튀김과 전, 빵도 만들 때마다 한두 개씩 얼려 놓았기에 언제든 프라이팬에 구우면 별식이 된다. 이제 난로를 지필 날도 많지 않기에 아침이면 난로 위에 저장 음식을 줄줄이 올려놓는다.
며칠 거세게 휘돌던 바람이 오늘은 어째 잠잠한가 내다보니 이따금 들썩 풀덤불을 부추기고 나무를 휘어잡는다. 바람도 고양이처럼 야행성 기질이 있다. 밤이면 집 주변을 어슬렁대다 한순간 숲을 통째로 들어 올릴 듯 야단을 떤다. 무서운 산불 소식도 이맘때면 간혹 들려와 안타깝게 만든다. 만물이 깨어나기 위해 겪는 한바탕 몸살 같기도 하다. 경칩이 머지않은 것이다. 마당엔 어느새 날벌레가 태연스레 날아다닌다. 먼지처럼 작은 생명이 겨울 혹한 어느 틈에 숨어 있다 나오는 것인지 경이롭다. 아무리 수상한 기후 변화도 절기를 거스르진 못한다.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 땅 속 벌레와 동물이 깨어난다는 경칩,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 논과 밭을 정비하여 농경을 준비하는 청명, 씨를 뿌리기 시작하는 곡우. 절기를 헤아려 그 명칭과 의미를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며 마음이 저절로 그 기운을 따라간다.
담장을 고치고 벽을 바른다는 경칩을 앞두고 동생과 함께 마당 입구에 시멘트를 발랐다. 마당엔 검은 아스콘이 깔렸는데 차량이 드나들 때마다 바퀴가 헛돌아 신경이 쓰였다. 40 킬로 레미탈 시멘트 두 포대를 물과 함께 섞어 시멘트 작업을 하고선 둘 다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몸이야 고달파도 미루던 일을 해냈다는 기쁨은 컸다. 뒷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난로 위에 올려둔 것으로 푸짐한 밥상을 차렸다. 이제 바람의 너그러운 처분을 바랄 뿐이다. 제발 시멘트가 굳기 전 비구름을 몰고 오진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