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강풍, 한파의 나날
한겨울에 먹기 좋은 음식으로 단호박 크림수프가 있다. 눈이 자주 내린 지난 며칠 동안은 거의 날마다 먹고 있다. 아침 첫 끼로도 좋고 저녁 식사로 가볍게 먹어도 좋다. 특히 하루의 빛이 사라져 가는 저녁, 어쩐지 마음 쓸쓸해질 때 따끈한 단호박 수프 한 컵을 창가에 앉아 작은 스푼으로 떠먹는 걸 나는 좋아한다. 밖은 조금씩 어둑해지고 뱃속은 다소 허전한 그런 상태. 고운 색의 부드러운 수프를 한 입씩 삼키고 있으면 몸도 하루도 토닥토닥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그 폭삭한 노란색이 뱃속에서 팔 미터의 여정을 하는 동안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포근하게 잠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단호박의 빛깔을 마음껏 음미하기 위해선 유리그릇에 담아야 한다. 적당한 유리그릇이 없다면 유리컵도 괜찮다. 한 번 만들어 며칠 두고 먹겠다면 뚜껑 있는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둘 것을 권한다. 냉장실 문을 열 때마다 눈앞의 고운 노란빛에 절로 웃음 짓게 될 것이다. 안녕, 나는 인사까지 한다.
<단호박 수프 끓이는 방법>
1. 단호박을 쪄서 껍질은 그냥 먹고 노란 속살만 한 컵 준비한다. *껍질이 꽤 고소하고 맛있으니 버리지 말고 꼭 드셔 보세요. 2. 믹서기에 단호박 한 컵, 우유 한 컵, 물 한 컵, 소금 두 꼬집을 넣어 간다. 3. 냄비에 넣고 끓인다. *우유를 조금 남겨 믹서기에 따로 갈아, 한 스푼 떠서 위에 얹으면 크림이 올라간 예쁜 단호박 크림수프가 됩니다.
“한겨울이 언제까지야?”
단호박 수프가 한겨울에 먹기 좋다는 건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러 온 동생에게 한 말이었다. 어제저녁 먹은 단호박 수프가 생각나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동생은 한겨울이 언제까지인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오늘까지야.”
나는 대답했다.
“정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동생과 나는 살고 있다. 중년의 자매가 아침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치고는 지나치게 순수하지 않은가. 이따금 동생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이런 류의 멍청한 질문을 나는 은근 좋아한다.
“오늘이 일월 마지막 날이잖아. 그러니까 오늘 까지지.”
아무 근거도 없는 말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다.
“그럼 내일부턴 한겨울이 아니야?”
하하 졌다. 이쯤 되면 나조차도 궁금해진다. 한겨울은 대체 언제까지일까.
어쨌든 내일부턴 이월, 겨울이 한 달가량 남았다. 삼월에도 꽤나 춥고 눈도 곧잘 오는 산골이지만 그땐 아무리 춥고 거센 눈바람이 몰아쳐도 겨울로 여겨지지 않는다. 봄눈에 꽃샘추위라고 버젓이 명칭도 있다. 한겨울이라 해도 봄날 같은 때도 있다. 그 역시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일 뿐 봄은 아니다. 얼마 전엔 정말 봄기운이 느껴지도록 한동안 날이 푸근했다. 연말 연초에 걸쳐 긴 혹한의 나날이 이어지더니 별안간 기온이 올랐다. 따사로운 볕 아래 세상은 이내 모습을 바꾸었다. 단단했던 땅은 부드러워져 금방이라도 초록 잎들을 내놓을 것 같았고, 새들은 흥분한 듯 지저귀며 이 나무 저 나무로 몰려다녔다. 추위가 잠시 가신 것뿐인데 사방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동생과 나도 덩달아 마음이 부풀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가까운 산마루까지 산책을 다녔다. 햇살이 환한 창가에 앉아 서로의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다.
잠시의 축제 같았던 술렁임은 며칠 전 사나운 바람과 함께 몰려온 눈구름에 이내 차분해졌다. 세상은 다시 하얗게 덮이고 기온도 영하 18도까지 뚝 떨어졌다. 폭설, 강풍, 한파를 경고하는 긴급재난 문자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강풍을 동반한 많은 눈과 추위가 예상됨에 따라 시설물 고정 강화, 도로결빙 주의, 동파 방지, 외출 자제 등 안전에 유의 바랍니다.’ 긴 코로나 시국, 중앙대책본부에서 숱하게 보내오는 재난 문자엔 진력이 나더니 행정안정부에서 보내오는 문자에는 반짝 긴장감이 돌았다. 폭설, 강풍, 한파 그런 험한 날씨의 명칭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이상한 활기를 준다. 창밖을 수시로 내다보게 되고 요즘 잘 틀지 않던 라디오도 켜놓게 되었다. 라디오에선 매 시각 58분이면 날씨 예보를 한다. 예보를 알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아무리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해도 매 시각 달라지는 건 아니어서 몇 번이나 같은 내용을 듣게 될 때가 많다. 그래도 여간해선 싫증 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날씨 예보만큼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거긴 괜찮니? 지금 여긴 눈이 엄청 내린다. 앞 동이 보이지 않을 정도야.”
현장감이 느껴지는 이런 통화도 반갑다. 폭설이 예보된 아침, 서울에 사는 언니가 걸어온 전화였다. 아파트 13층에 살고 있는데 주변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진다고 했다.
“글쎄, 잔뜩 흐리긴 한데 여긴 아직이야.”
대답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창 너머로 하얀 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머, 여기도 이제 시작인가 봐. 무슨 눈이 커튼처럼 내려오네.”
그랬다. 무대의 막이 내리듯 눈이 위에서 아래로 창을 채우며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눈이 아니라 폭넓은 광목이 펼쳐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창가에서 멀리 있던 중이라 흐릿한 시야가 만들어낸 진풍경 인지도 몰랐다. 전화기를 들고 창으로 다가섰다. 광목은 사라지고 결이 낱낱이 살아 있는 하얀 입자들이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니와 통화를 이어가는 동안 하얀 입자들의 밀도가 점점 짙어졌다. 도시의 아파트처럼 산골 마당의 맞은편 산도 이내 그 하얀 밀도 속에 지워져 갔다.
산골 생활 8년 동안 지금까지 눈이 가장 많이 내린 건 내 기억에 2014년 겨울이었다. 집 지은 이듬해 겨울. 밤새 내린 눈으로 바깥문이 열리지 않는 날이 있었다. 두 뼘 가까이나 되는 두툼한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인 세상. 어찌어찌 몸만 빠져나갈 정도로 문을 밀어 겨우 마당으로 탈출했다. 힘들여 문 앞의 눈을 치우고 마당에도 길을 낸 뒤 드디어 우리는 눈썰매를 탔다. 눈이 제대로 오면 마당 아래 비탈에서 눈썰매를 타겠다고 진작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파란색 눈썰매 두 개도 미리 장만해 두었다. 그날 하얀 눈보라를 일으키며 둘은 마음껏 비탈을 내달렸다. 어쩌면 달리는 재미보다는 산골 겨울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생활의 불편이나 고립의 위기감조차도 특별한 흥으로 여겨질 때였다. 한번은 눈썰매를 끌고 경사진 마을도로를 올라 고갯마루까지 간 적도 있었다. 고갯마루 위는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와 만나 삼거리를 이루는 곳이다. 겨울이 시작되면 경사가 심한 왼쪽 도로엔 차량 통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우리는 차가 다닐 수 없는 그 도로에서 좀 더 긴 코스의 눈썰매를 즐길 작정이었다. 설경도 근사했다. 도로 양 옆이 숲인 데다 지대가 높아 겹겹의 하얀 능선이 멀리까지 보이는 곳이었다. 눈이 겨우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그 도로엔 우리 말고는 오가는 사람도 없어서 뾰족한 고라니 발자국만 점점이 찍혀 있곤 했다. 그런데 그날 눈썰매를 끌고 그곳에 도착했을 땐 수상한 흔적이 마구 나 있었다. 누군가 경사진 눈길을 날렵한 도구로 수없이 미끄러져간 흔적, 아무리 보아도 스키 자국이었다. 혹시 고라니가 타고 간 게 아닐까. 그 당시 동생이 심각하게 말해 푸하, 웃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에서 스키를 탄 사람은 죽염 아저씨였다.
죽염 아저씨는 오십 대 후반의 나이로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번도 무표정하거나 찌푸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동생과 도로를 걷다 보면 간혹 지나가던 차량이 속도를 줄일 때가 있다. 우리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바퀴가 움직이다 차창이 내려가고 벙긋 웃는 얼굴이 나타난다. "춥은데 우예 괘안십니꺼. 한번 놀러 오이소." 구수한 경상도 억양이 뒤를 따른다. 길에서 누구를 만나도 집에 놀러오라고 권하는 사람이다. 차량에 부착하는 제설도구를 갖추고 있어 눈이 많이 오기라도 하면 슬그머니 우리 집 비탈길까지 밀어놓고 가는 아저씨. 마을도로에서 좀 벗어난 외딴곳에서, 인사동 옷이 잘 어울리는 부인과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머리도 일솜씨도 좋아 그곳의 규모 있는 살림집과 소금 굽는 창고를 직접 설계해 지었다. 아저씨가 굽는 소금은 대나무에 천일염을 넣어 아홉 번 구워 낸다는 구죽염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타입이라 품질이 꽤 좋다. 보랏빛이 감도는 굵직한 소금 알갱이를 나도 아껴 사용하고 있다. 부부가 알려준 대로 죽염 몇 알을 입안에 넣고 자면 아침에 입안이 개운하다. 가족이며 지인이 왔을 때 몇 번 구매하러 간 적이 있었다. 커피를 워낙 즐기는 부부라 그곳에 가면 우선 향 좋은 커피를 대접받게 된다. 특히 아저씨는 커피를 너무 좋아해 믹스 커피를 하루에 서른 봉지까지 마시다 병원에 간 이력이 있다고 했다. 그 뒤로 원두로 바꾼 지 십 년이 넘어 이제 웬만한 커피는 첫 모금에 원두의 종류를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스키도 커피만큼이나 좋아해 산골에 와서 산 지 십 년 남짓, 해마다 겨울이면 스키장에 다녀온다고 했다.
이번 겨울도 눈이 많은 편이라 고갯마루 도로에 스키 자국이 나 있을 만하다. 우리의 눈썰매는 몇 년째 얌전히 창고에 들어가 있다. 마당에 고양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뒤로 눈썰매를 탄 기억은 없다. 이제 눈이 오면 그런 놀이보다는 눈을 치우고 고양이집을 보완하는 데 마음을 쏟게 되었다. 눈바람이 몰아친 사흘 전에도 숲 고양이 밥 주러 가는 길에 눈삽을 밀며 갔는데 어제 아침 또 한 차례 눈이 내렸다. 기껏 낸 눈길이 다시 덮이고 말았다.
“아, 또 길 내러 가야겠네.”
눈이 그칠 즈음 동생이 창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래도 하늘하늘 떨어지는 예쁜 눈송이가 싫지 않았다. 다시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내리는 눈,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긴다. 어쨌든 겨울의 낭만은 눈이 아닌가.
“봄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자.”
나는 말했다. 결국 나가게 될 테지만 우선은 창가에 좀 더 있고 싶었다. 그래도 당장 고집불통 동생이 눈삽을 들고 나설까 봐 얼른 덧붙였다.
“단호박 수프 먹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