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제목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을 보았다. 언젠가 영화로 본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본 건 에피소드 4개로 된 방송 드라마였다. 가게와 골목이 주요 배경이다. 그 단순한 공간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자극 없이 고요한 응시를 보여 준다. 자극이 필요한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심심한 것을 반긴다. 먹는 음식도 그렇고 영상이나 책, 음악도 그렇다. 나를 좀 쉬게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영상을 본다. 음악은 언젠가부터 멀리하게 되어 자주 듣지는 않는다. 집 안의 냉장고 소리, 물 끓는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알 수 없는 기척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내는 소리도 있다. 차 마시는 소리, 문 여는 소리, 가끔 중얼대는 혼잣말.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같은 문장을 이따금 소리 내어 말한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도 몇 번인가 중얼거렸다. 한 줄로 충분한 시처럼 그런 말들이 좋다. 제목만으로 괜찮아 굳이 내용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제목이 괜찮으면 대개 내용도 괜찮았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겨울의 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자기 앞의 생, 박사가 사랑한 수식. 구월의 이분의 일, 영혼의 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런 책들. 한때 꽤 좋아한 만화 제목도 있었다.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까마득 오래 전, 어느 12월 31일 밤 어린 동생과 작당하여 부모님 주무시는 밤에 몰래 집을 나가 만화방에 갔다. 늦은 밤의 만화방은 어딘가 퇴폐적이었다. 열 권인가 되던 그 만화책을 전부 빌려와선 동생과 둘이 퇴폐적으로 밤을 새워 보았던 기억.
일상의 제목도 있다. 냉장고 앞을 지나다 보면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고정해 놓은 메모들이 보인다. 바다나무 식단, 고운비 식단, 강낭콩 식단. 엄마와 딸, 친구의 방문에 앞서 식단을 짜서 붙여 놓은 것들이다. 잡곡밥, 청국장, 콩나물국, 호박전, 버섯덮밥, 토마토덮밥, 비빔국수, 시금치 김밥, 채소구이 같은 메모들. 그 시절의 혹은 그날의 제목이다. 냉장고 옆에도 그런 메모들이 가득 붙어 있다. 굳이 없애지 않는다. 버섯 덮밥이나 채소구이 하나에 그날의 분위기, 웃음이 떠오른다. 어쩌면 어떤 시의 한 줄보다 더욱 마음에 스민 한 구절이다. 책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인상적인 첫 문장처럼 그런 기억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내 주변의 그런 관계로 드러나는 희미한 실루엣일 뿐이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에서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사람은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어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때로 혼자 있고 싶기도 하고, 날이 저물고 조용해지면 잠들어 버리지요. 혼자도 아닌 누군가와 함께도 아닌 생활. 전엔 미처 몰랐던 생활을 고양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눈 내리는 아침, 그 대목을 보다가 일어나 반죽을 했다. 밖엔 하얀 눈이 내리고, 난로의 장작은 붉게 타올랐다. 따뜻한 실내에서 부풀어 오른 반죽에 견과와 말린 열매를 넣어 모양을 잡았다. 둥근 도자기 접시 가운데 컵을 놓고 반죽을 둘러 오븐에 구웠다. 도넛 모양의 빵이 구워졌다. 설탕을 분쇄기에 갈아 하얀 분말을 만들었다. 빵 위에 채를 들고 눈 같은 분말을 솔솔 뿌렸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만들게 되는 빵이다.
눈이 그친 오후엔 동생과 나가 눈을 치웠다. 두툼하게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어 길을 냈다. 나무의 잎맥처럼 길이 뻗어갔다. 비탈길과 길 입구의 우체통까지 길을 내고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었다. “날이 저무는데 오히려 밝아지네. 보여?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가.” 눈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동생이 옆에서 말했다. 우리가 눈을 쓸 듯 바람이 먹구름을 빠르게 쓸어가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 저물다 말고 해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빨간 우체통 아래 하얀 눈사람을 두고 돌아오다 비탈길에서 눈보라를 만났다. 숲의 나무마다 곱게 쌓였던 눈이 거센 바람에 일제히 뽀얗게 날아올랐다. 연기처럼 하얀 눈보라 속에 잠시 서 있었다. 왜 이런가, 세상은. 가끔 너무나 아름다워 오히려 비애스럽다. 눈에 젖은 발자국을 현관까지 점점이 찍으며 돌아와 오늘의 제목을 돌아보았다.
눈 내리는 날 빵을 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