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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문을 열고 봄맞이

봄은 고양이로다

by 구름나무

올봄 마당일은 낡은 문을 손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현관을 거쳐 마당으로 나서려면 열어야 하는 바깥문. 그 문이 잘 여닫히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특히 비가 온 뒤 습기가 배인 문은 혼자 열기 힘들 정도로 뻑뻑해졌다. 파이처럼 겹겹이 부풀었다가 마르기를 거듭하면서 형태가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무문은 나름의 운치가 있지만 변형이 온다는 단점이 있다. 더구나 바깥문은 집 짓고 남은 자투리 판자로 만든 것이라 처음부터 허술했다. 표면도 들떠서 해가 갈수록 부스러졌다. 좋은 목재를 쓸걸 그랬다고 뒤늦게 생각해보았자 소용없다. 문을 만들 당시엔 어떡하든 빨리 일이 마무리되기만을 바랐다. 새로 목재를 들이는 시간과 비용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서류 절차부터 시작해 각종 측량에 끝없이 이어진 공사, 예상치 못한 장애까지 이년 여에 걸친 지난한 집 짓기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바깥문만 달면 드디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자투리 판자와 렉산을 이어 붙인 바깥문은 오히려 좋은 재질로 제대로 만든 다른 문보다 마음에 들었다. 왜 그런지 번듯한 것보다는 허술하고 낡은 것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인 것이다. 취향이 그러니 불평할 것도 없었다.


문을 손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변형이 온 곳은 문틀에 맞춰 깎아내고, 심하게 부스러진 부분엔 판자를 덧대는 것. 일단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잡은 뒤 톱으로 깎아냈다. 요령도 솜씨도 없지만 보수를 하면 어쨌든 상태는 나아진다. 다음은 판자 덧대기. 집 지은 지 팔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찾아보면 자투리 나무가 어딘가 남아 있었다. 적당한 모양의 판자를 찾아내면 일할 맛이 난다. 오래된 옷이며 이불도 마음에 드는 것은 덧대고 기워서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바래고 해진 것들의 색과 질감도 좋고, 오래도록 같이 한 세월의 정감도 있는 것이다.

자잘한 판자를 여러 군데 덧댄 문은 정감을 벗어나 조잡해 보였다. 실망하기엔 일렀다. 목재의 변신은 페인트로 완성된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으로 페인트를 조색했다. 색이 제각각일 땐 한 가지 색상을 연하게 풀어 입히면 통일감이 생긴다. 문 전체에 조색한 페인트를 입히고 덧댄 판자엔 다른 색상을 나누어 칠했다. 연두와 분홍, 흰색. 페인트 색을 정할 땐 계절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작년 봄에도 낡은 곳마다 페인트를 새로 칠했는데 분홍색 계열로 조색을 하게 되었다. 가을이었다면 갈색이나 카키 정도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집이 완성되던 무렵 칠한 창틀과 선반, 탁자들 색이 거의 그렇다.


보수를 마친 바깥문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려 문 아래쪽에 하얀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계획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연결. 그런 이어짐이 일에 재미를 준다. 일종의 리듬이다. 글을 쓸 때나 음식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리듬을 타면 일이 아니라 놀이가 된다. 내가 그리는 나무는 바람 부는 날의 나무다. 반드시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잎이 몇 개 날아가야 한다. 그래야 흡족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리는 건 나무도 바람도 아닌 공간, 혹은 흐름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판자때기에 나무 한 그루 그리는 걸로 그 공간엔 바람이 불고, 문득 자전거 바퀴라도 굴러올 것 같아지는 것이다. 세어본 적은 없지만 집 안팎에 비슷하게 그린 나무가 수십 그루는 넘는다. 탁자나 의자, 문, 벽면, 환풍기통 같은 곳 말고도 이불, 커튼, 가방, 옷, 심지어 신발 같은 곳에도 나무를 그려 놓았다. 이쯤 되면 나무에 단단히 홀린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보면 그리 야단스럽지 않다. 싫증 나면 지울 수도 있고 대부분 재활용이거나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곳에, 그림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려 놓은 것일 뿐이다. 그림 보는 눈도 없고 그리는 솜씨도 없기에 부담 없이 아무렇게나 그릴 수 있다. 어릴 때 학교 미술 시간, 수채화 물감으로 풍경을 그리면 늘 추상화가 되었다. 만들기 점수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림 점수는 바닥이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거나 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놓고 즐긴다. 그런 내가 “그림 전공하셨어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오,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언제 다시 그런 소릴 들어보겠나. 즐거운 기억이다.


20210314_125006.jpg 벽면에 붙인 판자들


내게 그 말을 한 이는 김덕희 씨였다. 이웃 농장 안주인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에서 살고 있어 주말에나 마을에 머물렀다. 두 해전인가 봄에 산책을 하다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안면은 있었지만 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마당 텃밭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차 한 잔 나누자고 안으로 청했다. 차를 우리고 견과를 준비해 놓았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을 실례라 여기는지 들어오질 않았다. 준비한 걸 쟁반에 담아 들고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김덕희 씨는 벽에 붙여 놓은 판자 앞에 서 있었다. 나무를 그려 놓고 낙엽처럼 자잘한 글자를 가득 써 놓은 판자였다. 김덕희 씨는 그곳에 써놓은 글을 꼼꼼히 읽는 중이었다. 아이고, 싶었다. 누구 읽으라고 써놓은 게 아니었다. 글자도 그림의 하나였다. 의미를 담기보다는 글자 자체가 좋아 써놓은 것이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글씨가 들어간 사물을 좋아했다. 누군가 나타나 그걸 글로 읽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차 드세요.”

가까이 있는 외부 선반에 쟁반을 내려놓고 나는 김덕희 씨를 불렀다. 그때 다가오던 그녀가 한 말이 그것이었다. 그림 전공했어요? 어머,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찻잔을 들어 건넸다. 차를 한 모금 맛본 김덕희 씨는 찻잔 속을 가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좋네요. 차는 얼그레이였다. 무얼 마실 건가 물었을 때 홍차가 있으면 달라고 해서 준비해 나온 것이었다. 선 채로 차를 마시며 그녀는 또 주변에 두루 시선을 옮겼다. 집을 왜 이렇게 지었나,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샌드위치 패널로 단순히 지은 집은 얼핏 창고처럼 보였다. 전원주택이라면 흔히 떠올릴 모습은 아니었다. 얘, 무슨 집을 물류창고처럼 지었니. 집이 완성되었을 때 처음 찾아온 엄마도 그런 말을 했다. 김덕희 씨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벽을 따라 또 움직였다. 나는 의자 두 개를 선반 가까이 가져다 놓고 앉아 차를 마셨다. 잠시 뒤 집 뒤꼍까지 한 바퀴 돌고 온 김덕희 씨도 의자에 와서 앉았다.

“여긴 큐레이터가 필요하겠어요.”

말이 적은 사람 같은데 어째 하는 말마다 평범치는 않았다. 표정을 보니 놀리는 건 아니었다.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림이나 사진 전시회 같은 곳에 이따금 다닌다고 했다. 뭘 알아서는 아니고 그런 곳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도시와 농장을 오가며 가까이 사는 양가 부모님도 챙겨야 해서 일이 끊이질 않지만, 가끔은 입은 차림 그대로 가출하듯 나와 버린다고 했다. 그날도 머릿수건에 일복 차림새를 보아 농장에서 일하던 중에 훌쩍 나온 것인 모양이었다. 저마다 수월치 않은 삶이겠지만 잠시라도 자신에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에게선 공간이 느껴진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던 ‘자기만의 방’ 같은. 내 그림 솜씨야 어떻든 그날 우리 집 마당은 잠시 김덕희 씨만의 갤러리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20210314_130227.jpg 현관문에 그린 나무

낡은 문의 마무리는 목공본드로 했다. 비닐봉지에 든 목공본드 205를 물과 섞어 문 위에 몇 겹 발랐다. 방수 효과도 있고 표면의 부스러짐도 막을 수 있었다. 하얀 크림 같은 목공본드 205는 마르면서 투명하게 변한다. 공기가 들어가면 굳어버리기에 끝을 잘 아물려 뚜껑 있는 통에 보관하고 있다. 본드를 꺼낸 김에 집성목 판자 쪼개진 것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만들고 남은 것에 그림을 그려 바깥벽에 세워 놓았는데 작년 긴 우기를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집성목의 약점이다. 집성목은 나무를 모아 접합을 한 판재로 두께도 다양하고 다루기 쉬워 간단한 가구를 만들기에 좋다. 집안에 둔 건 괜찮더니 밖에서 습기나 볕에 오래 노출된 것은 접합 부분이 곧잘 빠졌다. 그 빠진 부분에 목공본드를 발라 붙이면 복구가 가능했다.

판자를 붙이는 동안엔 또 언젠가 망가진 상에서 떼어놓은 상다리 생각이 떠올랐다. 복구한 판자에 상다리만 달면 탁자가 될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밖에서 쓸 탁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일은 계속 이어진다. 한참 미루던 일이라도 일단 시작하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 꺼내 놓은 페인트와 붓, 스펀지도 아직 정리하지 않았다. 미련이 남은 때문이었다. 텃밭 경계의 작은 울타리도 다시 칠을 입힐 때가 됐다. 집 지은 해에 옥색을 칠했는데 이젠 거의 희끗하게 바랐다. 이번엔 깔끔하게 하얀색으로 칠할까, 생각이 저 혼자 나아가는 동안 나는 본드가 채 마르지도 않은 판자를 엎어놓고 상다리를 붙였다. 이왕이면 울타리까지 칠하자고 결심이 서자 얼른 마무리를 해야겠다 싶었다. 나사를 구멍에 맞춰 드라이버로 끼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집중을 요했다. 그때 방해꾼이 나타났다. 동생이었다. 야자매트 작업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20210315_114242.jpg 목공본드로 붙인 판자에 상다리를 달아 탁자로 만들었다


올봄 동생은 야자매트라는 것에 꽂혔다. 풀 나기 전 마당 정리를 하고 싶어 하더니 어느 날 큰 언니와 통화를 하다 정보를 얻었다. 요즘은 공원이나 산길에 야자매트를 많이 깔던데 괜찮더라. 정보를 준 바람에 언니는 야자매트 구입에 후원까지 하게 되었다. 우선 두 롤을 사서 고양이 식당 주변에 깔아 보기로 하여 그날 동생은 아침부터 마당 다지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야자매트는 부피가 커서 화물택배로 도착했다. 60센티 폭에 길이 10미터, 무게는 30킬로. 크기가 다양했지만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는 그것이었다. 혼자 작업하기는 힘들었다. 울타리 칠을 단념한 나는 벌여놓은 도구들을 정리한 뒤 나가서 동생을 거들었다. 야자매트는 코코넛 껍질을 가공해 돗자리처럼 만든 것이었다.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와 비슷한데 좀 더 두툼했다. 굴려서 옮기는 것은 쉽지만 원하는 길이에 맞춰 자르는 게 힘들었다. 전지가위로나 겨우 자를 수 있었다.


야자매트가 깔린 고양이식당 주변이 말끔해졌다. 이제 동생은 온 마당에 야자매트를 깔고 싶어 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여름이면 풀이 무섭도록 자랐다. 하지만 야자매트라는 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마당 일부만 깔끔하게 꾸며놓자고 타협을 했다. 나는 야자매트로 마당을 꾸민다면 그곳에 파라솔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파라솔 세트는 늘 갖고 싶던 것이었다. 비용보다는 새로운 물품을 들여야 하는 부담에 번번이 미뤄왔던 일이었다.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쉼터가 있어야 한다. 초기에 쉼터로 쓰던 미니하우스는 고양이식당이 된 지 오래였다.

새로운 일을 벌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어서 고민을 끝내고 일상의 평온을 찾고 싶었다. 결국 야자매트 여덟 롤과 파라솔 세트를 주문했다. 복잡한 마음엔 일이 최고였다. 날마다 마당에 나가 땅을 다지고 텃밭을 정리했다. 아침이면 여전히 쌀쌀해 오늘은 쉬자 마음먹게 되는데 볕이 나면 슬며시 몸을 일으키게 된다. 곤충들과 다를 것 없다. 추우면 굳어버리고 따뜻해지면 움직인다. 일을 시작하면 또 미련을 못 놓고 해가 기울 때까지 하게 된다. 텃밭 울타리도 낡은 새장들도 다시 칠했다. 새장은 이제 장식일 뿐이다. 입구를 비닐로 막아두었다. 우리 집 주변은 더 이상 새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곧 집안에서 겨울을 난 마당고양이들이 해방될 것이다. 지난가을 어미 고양이가 다치는 바람에 마당고양이 가족은 동생네 작은방에서 겨울을 났다. 상처가 깊어 이제야 겨우 아물었다. 날씨를 가늠해 며칠 내로 풀어놓을 생각이다. 야자매트를 깔겠다는 동생의 발상도 사실은 마당고양이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겨우내 좁은 방에서 갑갑하게 지낸 녀석들에게 아늑한 마당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야자매트는 고양이들이 뛰어놀기에 더없이 좋은 재질이었다.


변덕이 심한 봄날의 날씨. 한동안 볕이 따사롭더니 지난 이틀은 바람이 불고 날이 어둑했다. 가벼운 눈발마저 날렸다. 그래도 텃밭엔 두메부추 연초록 싹이 오르고 진초록 파는 한 뼘이나 자라났다. 남쪽 지방엔 매화에 벚꽃까지 피었다고 한다. 우리 마당에도 노란 양지꽃이 오르고 벼랑 위엔 생강나무꽃이 아른아른 피었다. 새로 단장한 낡은 문을 열고 날마다 새로운 봄을 맞는다. 보송보송 향기롭고, 미친바람이 불고, 나른한 졸음에 푸른 생기가 오르는. 오래 전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1599795040379-1.jpg 고양이식당, 마당고양이 가족
1616213762533.jpeg 야자매트와 동생
1616213746856.jpeg 마당에 근사한 휴식 공간이 생겼다
1616213814809.jpeg 봄이면 가장 먼저 피는 벼랑 위 생강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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