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딸이 강원도 산골에 왔다. 15개월 만이다.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만나려고 미루던 방문이었다. 바이러스는 여전하지만 더 이상 기다리기엔 지쳤다. 오래 닫아두었던 딸아이 방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닦아냈다. 커튼이며 침대보도 다시 빨아 봄볕에 바짝 말렸다. 준비만으로도 활기가 돌았다. 무얼 먹일까, 흥도 났다. 양파와 당근, 양배추, 두부, 오이를 샀다. 준비는 소박하지만 밥상은 풍성할 것이었다.
딸아이는 채식을 한다. 몇 년 전까진 치즈와 우유, 달걀 정도는 먹었는데 이젠 전혀 안 먹는다. 벌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에 꿀조차 멀리 할 정도로 철저해졌다. 그렇다고 딸에게 차려주는 밥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밭작물은 아직 심기도 전이지만 마당엔 먹을거리가 많다. 저절로 자라는 쑥이며 개망초, 냉이, 달래, 당귀에 제비꽃만 곁들여도 특별한 산골 밥상이 된다. 딸아이가 도착한 날엔 개망초며 갖가지 나물 김밥에 제비꽃 샐러드를 만들어 동생과 딸과 함께 마당에서 먹었다.
마당에서 먹은 나물 김밥과 꽃 샐러드
개망초는 새로 뜯은 것이고 취나물, 뽕잎나물, 깻잎나물은 저장 해 둔 것들이다. 양파와 마늘을 잔뜩 썰어 기름에 볶은 뒤 나물을 넣어 조리는 게 내 나물반찬 비법이다. 밑반찬은 냉장실 안쪽에 넣어두었던 온갖 장아찌를 꺼내는 것으로 해결된다. 두릅장아찌와 바질, 파슬리, 마늘종, 고추, 깻잎 장아찌. 냉동실에선 바질 페스토가 나오고 실온에 보관한 토마토 병조림과 오이 피클도 있다. 토마토 덮밥과 바질 페스토 국수는 딸에게 엄마의 대표 음식이다. 된장찌개와 쑥국에 두부, 양파, 당근 구이를 곁들인 밥상도 마찬가지다.
일은 다 밀쳐두고 논다. 꿈같은 봄날이다. 낮엔 따사로운 볕이 내리다가 이른 아침엔 서리가 내린다. 다정스레 불던 바람은 한순간 성질을 돋우며 비바람을 부른다. 진눈깨비도 잠깐 다녀갔다. 어떤 리듬 속에서도 꽃들은 연이어 피고 있다. 골고루 구색 갖춘 날씨도 꽃들에게 초대받은 반가운 손님 같다. 산골 세 여자도 얇은 옷과 두툼한 옷을 번갈아 걸치며 축제를 즐긴다.
마당 어디서나 자라는 보라색 제비꽃, 돌아서면 피어 있는 노란 민들레꽃. 살랑살랑 꽃다지에 하얀 냉이꽃. 마당 둘레엔 과일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뽀얀 자두꽃이 제일 먼저 피었다.폭삭한 배꽃과 화사한 앵두꽃이 뒤를 잇고, 쌀밥이 쏟아진 것 같은 조팝꽃도 사방에 무더기로 피고 있다. 비탈길 옆 늘어진 능수벚나무도 줄줄이 꽃망울을 터뜨렸고, 걸어가는 길가엔 마을 벚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숲고양이 밥 주러 가는 길도 온통 꽃길이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이 흩날린다.
조팝나무꽃과 능수벚나무꽃
셋이 모였으니 흥이 넘친다. 저마다 아는 꽃과 풀이름을 대느라 바쁘다가, 꽃 사이 오가는 새를 두고 딱새니 곤줄박이니 의견이 분분하다. 까마귀의 요란한 목울음과 산비둘기 특유의 리듬 소리에 웃음이 터진다. 너무 떠들었다 싶을 땐 딸아이에게 노래를 청한다. 딸애는 재즈 풍의 노래를 꽤 잘 부른다. 성품은 강하고 털털한데 노래는 섬세하고 몽환적이다.
마을 벚꽃길, 마당에서 마시는 꽃차
집으로 돌아올 때 한 줌 훑어온 잎이며 꽃은 그날의 차가 된다. 솔잎차, 잣잎차, 쇠뜨기차, 벚꽃차, 제비꽃차, 화살나무차.
“다들 바쁜데 왜 얘는 느긋하냐.”
동생이 말했다. 마당 복숭아나무 앞 파라솔 아래 앉아 솔잎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복숭아나무는 이제야 자잘한 분홍 꽃봉오리를 맺었다. 복숭아 꽃잎은 천천히 열린다. 며칠에 걸쳐 꽃잎을 겨우 사분의 일 쯤 열었다. 유난히 볕이 좋은 날이라 “우리 다녀오는 동안 두 배는 더 필거야.” 산책을 나서며 내가 장담했는데 그대로였다.
“서두를 게 뭐 있겠어. 열매가 가을에나 익잖아.”
차를 마시던 딸애가 말했다.
“아, 그러네. 벚나무나 앵두 같은 애들과는 달라."
"오, 그러게. 걔들은 여름 전에 익어야 해서 바쁘구나.”
동생과 나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감탄이 나오는 산골 생활. 저녁엔 뭘 먹을까로 대화는 이어졌다.
"엄마는 쉬셔. 저녁은 내가 할게."
딸애가 선뜻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토마토와 두부가 있으면 만들 수 있는 자신 있는 요리인 모양이었다. 꽃들이 바쁜 저녁 나는 한가하게 책을 손에 잡았다.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 시선은 따뜻한데 냉소가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편협하지도 치사하지도 않고, 허세도 없다. 글이 마음에 들면 작가에게로 관심이 샌다. 절대 사기에 넘어가거나 칭찬에 넘어갈 타입은 아닌데, 인간미 넉넉한 사람이 그려진다. 책에 오롯이 집중하기는 힘든 것이, 내가 없는 부엌에서 탁탁탁 기분 좋은 도마 소리가 울리는 봄날의 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