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입밴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게 되는 건 인사와 욕, 사랑에 관한 말일 것이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도 Oh la la (울랄라!)는 알듯이 유명한 감탄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감탄사 중에서 제일 웃겼던 건 Oh, la vache!(우, 라 바쉬!)였다. La vache는 암소라는 뜻이라서 어디가 어떻게 깜짝 놀람을 전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깜짝 놀랐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란다. 영어의 Holy cow! 나 마찬가지이고. 라 바쉬는 학교에서 선생님과도 쓸 수 있을 만큼 거칠거나 무례함이 없는 말이라 했다. 뭔가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선물이 생각보다 훨씬 멋지거나 할 때. 라 바쉬!라고 하면 된다고. 알다가도 모를 센스라고 생각했지만 재미있었다.
다니엘 부모님의 캠핑장을 처음 찾았을 때부터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다. 캠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수영장은 대체 누가 관리하는 시설인지,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첫 방문 때에는 수영장에 관한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다시 파리로 올라왔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 방문에는 근처에서 야영하던 아이들로 가득했고, 수영장은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용 요금도 어른 한 명에 2유로라니. 수영복도 챙겨 왔겠다, 신이 나서 옷 안에 수영복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캠핑장 안에도 작은 수영장이 있긴 했지만 시영 수영장이 좀 더 널찍한지라 그곳을 이용하고 싶었다. 우리가 무사히 수영장 입구를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신나게 이용료를 내고 샤워실로 향하는 나를 한 사람이 가로막았다. 여자는 내게 뭔가를 전하려고 했지만 나는 interdit(금지된) 외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그분은 영어를 할 수 있었고, 내게 댁 남자 친구의 반바지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아, 저거 수영복 맞는데 반바지로 오해하셨구나. 나는 저거 수영복이에요! 자신 있게 이야기를 했는데 어째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남자 샤워실 문 앞을 향했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다니엘을 불러내야 했다. 다니엘의 수영복은 정말 평범했다. 스포츠계의 이케아인 데카슬론-등산, 서핑, 축구, 온갖 가지 스포츠 용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에서 10유로인가 9유로를 주고 산 것이었고, 남색이었다. 다만 딱 붙지 않아서 평범한 반바지처럼 보일 뿐이었다. 알고 보니 수영장에서는 딱 붙는 수영복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해변에서, 또 수영장에서 유난히 스피도 삼각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던 나는 거기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르마스 다질에 가서야 깨달았다. 입구에서 다시 4유로를 환불받았고, 막 수영을 마치고 나온 핸드볼 어린이 팀에 섞여 터덜터덜 걸었다. 우리는 아쿠아슈즈를 신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우리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는지 킥킥 웃으면서 '저기요! 맨발로 걸으면 발이 더 빨리 말라요'라고 했다. 그날은 매우 더웠고, 우리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걷고 있었다. 발바닥에 굳은살 하나 없을 것 같은 어린이들이 어떻게 그 불지옥 같은 뜨거운 길을 맨발로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해 오니 약간 궁금해졌다. 이 녀석들 혹시 양아치인가? 너희들, 혹시 어른들에게 불지옥의 쓴맛을 알려주고 싶은 거니? 우리는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우리 발은 애초부터 젖은 적이 없었기에.
야심차게 캠핑장을 나선 우리였다. 이대로 돌아가는 건 김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개울에서나마 물놀이를 해볼까 했는데 건너편 강둑에 저번에 왔을 땐 없던 염소들이 방울을 흔들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방목 철이 왔던가 보다. 염소들 중 몇 마리 정도가 개울에서 볼일을 해결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했고, 어쩐지 물색도 전보다 탁했다-이건 전날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남은 건 캠프장에 딸린 수영장이었다. 그리고 캠핑장에는 시영 수영장과 똑같은 안내가 붙어 있었다. '반바지형 수영복 금지'라고. 아이고! 나중에 부모님께 여쭤보고 허락을 받아 들어가긴 했지만, 반바지형 수영복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 탄압을 받는 것인가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냥 반바지처럼 보이는 반바지형 수영복을 하루 종일 입고 다니다가 수영장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조항이 생겼단다. 그러니 혹시라도 프랑스에서 캠핑을 하신다면 남자분들 수영복은 꼭 딱 붙는 것으로 준비하십시오. 그냥 수영장은 안 가봐서 보통 수영장도 이런 조항을 붙이는지는 모르겠다.
누아무띠에에서 지내는 동안 다니엘의 어린 조카가 늘 붉은 시럽을 물에 타 먹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분자청이나 백년초 시럽 같은 건 만들어 먹지만 다니엘의 사촌이 따라주는 시럽은 약간 팥빙수에 뿌려먹는 딸기 시럽처럼 생겼던 것이다. 보르도 다음으로 찾은 르마스 다질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울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어린이 핸드볼 팀 아이들이 캠핑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었다. 다니엘과 동생은 테이블을 만들었고, 부모님은 요리를 하셨다. 나는 각 테이블에 나를 물을 병에 담았는데 모든 병에는 다니엘 어머니가 따른 색색의 시럽이 들어있었다. 다니엘의 조카가 먹었던 빨간색 시럽 그레나딘(Grenadine: 라즈베리, 카시스, 엘더베리, 딸기, 레몬.. 가끔 바닐라도 섞어 만든 빨간 시럽)부터 살구 시럽, 레몬 시럽, 페퍼민트 시럽까지. 물론 이런 시럽들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비슷한 마실 거리도 많지만 카페 쇼나 바에서 보던 시럽들이 어린이들의 식탁에 자리 잡은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다니엘의 어린 조카 앞에서 그 애의 그레나딘 시럽을 뺏어 먹는 건 양심에 매우 찔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파리에 돌아온 후 슈퍼에서 산 그레나딘을 마셔 보았다. 예상대로 잘게 간 얼음 위에 끼얹어야 할 것 같은 부드러운 단맛이었다. 딸기맛 시럽보다는 채도가 낮은 단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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