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행 조각 모음 - 5

by 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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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_5028852591572182112800.jpg 케이블카로 2/3를 올라오는 코스가 아니었다면 올라가지 않았을 것 같다

셩봉이라는 호숫가의 슈퍼에서 장을 볼 때였다. 한 컵라면의 상표를 확인한 나는 미처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짜증 섞인 코웃음 소리를 냈다. 컵라면 상표가 반자이(Banzai)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부족한 보급과 화력으로 인해 적극 사용한 반자이 돌격-그냥 총검이나 긴 칼만 들고 냅다 돌격하는 전법-이 가장 먼저 생각났고, 굳이 남의 나라 역사를 아는 게 의무는 아닌지라 프랑스의 잘못까진 아니었지만 프랑스에 온 후로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곤니찌와에 아리가또우 운운하는 헛소리를 들어온 것에 이 역사적 무지가 얹히니 살짝 신물이 났을 뿐이다. 하긴, 그 전쟁에서 일본과 엎치락뒤치락한 미국에서조차 카미카제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판인데 프랑스의 뒤틀린 오리엔탈리즘부터 패는 것도 불공평하다면 불공평하다. 왜 하필 반자이인가, 다른 상품 선반을 기웃거리던 다니엘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반자이 어택 들어본 적 없어?'라고 물었는데, 아무래도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발등에 떨어진 불은 독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남의 교전국 전법에까지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역사에 제법 관심이 많은 다니엘이지만 처음 들어본다면서 반자이 돌격의 의미에 입을 쩍 벌렸다. 식품 회사 입장에서는 '글쎄요, 우린 그냥 맛이 너무 좋아서 만세!(반자이) 한다는 의미로 썼습니다만?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닌지?'라고 반론할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건 유럽에서라면 먹혀들어가겠지만. 반대로 동양 식품 회사가 맛이 너무 좋아서 다른 음식 다 무릎 꿇린다는 의미로 유럽에 Sieg heil(지크 하일) 즉석식품을 팔면 그건 곱게 보일까? 프랑스는 내가 오래 산 나라도 아니고, 이건 프랑스만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무지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고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은 뒷목을 뻑뻑하게 만든다. 그나저나 브랜딩이나 마케팅, 하다못해 CI(기업 로고) 하나 디자인하는데 기업이 들이는 돈이 천문학적인 판에 LUSTUCRU 사는 반자이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을까? 정말? 구글에 반자이만 쳐도 연관검색어로 뜨는 게 반자이 어택인데? 의심스럽다. 의도야 어쨌든 이렇게 LUSTUCRU 사는 프랑스에 온 후 처음으로 나의 불매 리스트에 오른 기업이 되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image_1005920631572182249112.jpg 다니엘 동생 부부와의 점심시간

나는 가끔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이 나갈 때가 있다. 주로 어색한 사회적 관계에서 그런 상황이 자주 생긴다. 예를 들어 누가 Hi Guys라고 하면 상대가 혼자인지 다수인지 나한테 한 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Hi guys'라는 대답은 이미 내 입술을 벗어나는 중이다. 아파트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누가 내게 Bonjour라고 하면 나는 이미 Bonjour라고 대답하고 있다. 저녁이든(저녁에는 Bonsoir) 아니든, 나한테 한 말이든 아니든. 그래서 생긴 어색한 순간들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 버릇은 여태껏 고쳐지지 않고 있다. 다니엘 부모님을 뵈러 캠핑장에 갔을 때, 그곳에는 다니엘의 동생 부부가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있었고, 다른 가족들이 캠핑장 운영을 위해 몇 시에 일어나는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 어색한 다니엘 동생의 남편에게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밥 먹었니'라고 물어보았다.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밥 위주로 인사하지 않는데도. 아무튼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어색함을 깨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 좋은 다니엘의 매제는 먹었다고 하고 좋은 하루 보내라며 멀어져 갔지만 다니엘은 '뭐야, 밥 당연히 먹었지. 일어난 지가 언젠데.'라고 말꼬리를 휘어잡는 것이 아닌가. 쒸,,, 익,,,, 몇 시가 되었건 어떤 사이건 밥만 먹었냐고 물어보면 되는 건데, 이게 얼마나 편한 인산데 암것도 모름서.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밥 먹었냐고 물어본다 설명했지만 다니엘은 한없이 의심스러워했다. 나는 이 남자가 한국어를 배워가는 순간이 매우 기대된다. 너는 실수 안 할 것 같지 다니엘? 흐...흐흐흐...


image_2347426351572182215098.jpg 고작 서부와 남부를 돌았을 뿐인데 이 나라가 얼마나 큰지 잘 느껴졌다. 질투가 많이 났다.

할아버지 댁이 있는 누아무띠에와 부모님이 사시는 르마스다질을 지나면서 우리는 직접 요리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식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밤 우리는 볼록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얼굴로 잠들었는데, 다니엘이 프랑스어를 하나 알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다니엘 앞에 앉았더니 J'ai la peau du ventre bien tendu. 잘 먹었을 땐 이렇게 말하면 된단다. 직역해 보니 저는 잘 늘어난 뱃가죽을 가지고 있습니다...였다. 현실적이군.


부모님이 포도를 나눠주셔서 다니엘과 같이 우리 샬레(오두막집)에 가져와 먹었다. 머루포도 같은 종류였다. 어차피 나와 다니엘뿐이니 눈치 볼 이유도 없어서 포도알을 쏙 빼먹은 후 남은 껍질을 내 앞 접시에 쌓아가고 있었는데 다니엘이 왜 포도를 그렇게 먹느냐는 거다. 얘가 시비도 참 싱그럽게 거네. 그냥 곱게 포도나 먹지? 싶어 눈을 세모로 뜨는 순간 다니엘이 귀엽다는 듯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 아저씨, 말 참 헷갈리게 하네. 자기 딴에는 진짜 신기해서 그렇게 먹냐고 한 거였다. 알고 보니 여기서는 그냥 껍질째 씹어먹는단다. 하지만 다니엘이 살면서 본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고, 다니엘이 포도를 그리 즐겨 먹는 편도 아니어서 이 넓은 프랑스에 나처럼 포도 까먹는 사람 하나가 없을까 생각하며 그냥 먹던 대로 먹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선 조심해야겠다.

image_4428831251572182319148.jpg 잘 놀다 왔다

차를 빌려 이동하는 것도, 또 르마스다질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보는 것도 처음이라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다. 나한테나 나름 해외여행이지 다니엘한테는 자기 나라 여행이라 혹시 지겹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다니엘도 프랑스를 자주 돌아본 편이 아니어서 같은 것에 감동하고 같은 것에 행복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온 후로 여행지를 선택할 때 가급적이면 아시아 지역은 배제하고 있다. 모처럼 11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여기 와 살고 있는데 고작 몇 주 놀자고 다시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로 돌아가 다시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올 수는 없다는 오기도 있고-기왕 갈 거면 한국 갔을 때 한번에 해결하고 오자는 의지-, 내가 유럽 여행은 해보지 않은 탓도 있다. 게다가 아시아 지역에 가는 건 (한국에서) 30만 원, 20만 원이면 가던 여행지를 100만 원씩 내고 가야 한다는 본전 생각에 너무 고통스럽다. 프랑스에서 몇 년이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인종 차별, 그리고 갖가지 행정 처리에 들어가는 고통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꼭 '본전' 이상의 행복을 울궈내고야 말 것이다. 각오해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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