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취향에 눈떴다
한국 사는 동안은 옷을 살 때 재질에 구애받지 않았다. 집에서 크린토피아까지 거리가 무척 가까웠고 혹시 아끼는 옷이라 싼 맛에 세탁하기에는 좀 신경 쓰인다 싶으면 국가공인 기능사의 손길을 자랑하는 동네세탁소에 맡기면 되었다. 그래서 옷장을 보면 모시부터 울, 리넨, 폴리, 실크까지 다양했다. 옷이 마음에 드는지와 가격이 가장 중요했지 재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프랑스에 온 후로는 변했다. 여기도 세탁소가 있고 중요한 옷은 드라이클리닝을(우리동네는 양복한벌 기준 16유로) 부탁하지만 한국 살 때처럼 세탁소에서 옷을 망쳐도 신나게 항의할 수준은 아직 안 되는지라 평생 입을 작정으로 산 옷은 웬만하면 한국 들어갈 때 가져가서 세탁해온다. 당연히 불편하지만 원래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는 거라 어쩔 수 없다. 지나간 짜장면과 세탁에 실패한 옷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째 전반적으로... 옷이 살짝 빨리 닳는 감이 있다. 코인 건조기 출력이 너무 강해서-보통은 4단계로 조절 가능하다. 나는 중간에 놓고 쓴다-일까..? 아니면 석회물 때문일까?
욕실도 건식이라 세탁에 애로사항이 꽃 핀다. 한국에 사는 동안은 폭 넒은 모시 치마도 편하게 빨고 물방울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욕실에 걸어놓으면 그만이었는데 여기는 그렇게 하는 순간 물바다가 된 욕실을 쫓아다니면서 치워야 할 테니 그것도 여의치 않다. 마룻바닥이나 갈라진 타일처럼 물이 스미면 좋지 않은 환경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그 두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도 스웨터나 살짝 비싼 속옷, 원피스 정도는 세탁할 수 있다. 모시 치마와 이들의 차이라면 위에서 말한 옷들은 물이 빠질 때까지 아무렇게나 구겨서 욕조에 방치해도 되지만 모시는 세탁을 마친 순간부터 잘못된 모양이 잡히지 않게 신경 써서 걸어둬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열거한 상황을 보시면 나의 쇼핑 기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감이 오실 것이다. 가급적이면 드라이할 필요가 없고, 집에서 빨아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옷이어야 한다! 손빨래에 관한 집착이 생긴 다음부터 나의 폴리 사랑에는 불이 붙었다.
내가 운이 나빠서일까, 파리 지하철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8호선 라인을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에스컬레이터 기름때가 손이나 옷에 묻는 날이 있었다-하긴 어려서부터 다 같은 트럭 옆에서 놀아도 혼자만 기름때를 묻혀 나오는 건 나였다-. 안 그래도 심란한 아침 출근길에 이런 일이 생기면 월요병이 한층 심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한국에 살 때도 한번 가지고 다닌 적 없는 물티슈를 가지고 다녔다. 울 코트에 이런 오염이 묻으면 무조건 세탁소 행이지만, 폴리면 아무 문제 없다. 집에서 중성세제로 비벼놓고 살살 헹궈 말리면 그만이다. 점심시간을 희생해 가며 세탁소를 찾을 필요도 없고, 세탁소 주인과의 스몰토크 때문에 내적 시뮬레이션할 필요도 없다. 세탁을 마친 옷을 코인세탁방 건조기에 넣으며 오늘은 또 얼마나 줄어 나올까 걱정하는 수고도 던다. 이 얼마나 멋진 옷감인가! 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해도 대충 물에 넣고 샴푸를 짠 다음 주물 거리다 헹구면 끝이다. 손상 걱정이 별로 없고 세탁이 편한 폴리 사랑에 내성적 성격이 더해지니 점점 집 세탁의 매력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래서 겨울을 맞은 지금 나는 다니엘의 양복에 딸려온 세탁소 비닐과 홈드라이 세제로 집에서 드라이클리닝을 시도해 보기에 이르렀다.
세제 향기도, 이름도 한국에서와는 다르지만 손을 움직이면 뭐라도 하나 깨끗해져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향수병에 자잘한 감정싸움으로 한바탕 울고 일어나면 머리만 아프지만 우는 대신-혹은 울면서- 빨래라도 하면 내 옷이라도 몇 벌 깨끗해져 있으니 약간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 작은 변화 때문인지 모노프리에서 구연산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반가웠다. 팔긴 아무 데서나 다 파는 건데 전에는 지금만큼 세탁에 관심이 없어서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무게감은 한없이 가벼우면서 거친 빨래의 과정에도 깎여나가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하는 폴리 혼방 옷감은 황야를 해쳐 나가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갖추었다 하겠다.
첫 프랑스 생활 때에는 코인 세탁방 이용에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못했었다. 출력 빵빵한 건조기 덕분에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속옷에 잠옷 바지가 점점 까끌까끌해져가는데도 어차피-비자 상- 1년 후면 이 생활도 끝이라는 생각에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에 돌아와 폴리 섬유 처돌이가 되고 나니 내 세탁기도 갖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좀 더 섬세한 건조기도 갖고 싶다. 일부러 정 붙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첫 1년에 비하면 좀더 여유가 생겼다 하겠다. 회색 일색인 겨울의 파리에서 삶을 더 사랑스럽게 장식하는 건 이런 고집과 의욕인가 보다. 처음부터 정주지 않으려 버티지도 않고, 원하는 삶을 일찌감치 포기하지도 않는. 그래도 생활 물가는 팍팍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