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과일이 왜이래

참을 수 없는 노맛

by 체리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완연한 겨울에 접어든 지금 한국에서 가장 그리운 거라면 겨울마다 박스째로 갖다놓고 먹던 귤이다. 청귤 차도 그립다. 딸기에 복숭아에 포도, 골드키위, 자두, 한국배, 참외.. 한국 과일이 무척 맛있다는 건 프랑스에 살기 시작하면서 실감했다. 프랑스는 농업 대국이고, 무엇보다 미식의 나라라고 정평이 나 있어서 막연히 과일도 맛있을 거라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웬걸, 유통 문제 때문인지 일단 마트에 가서 보는 과일은 무조건 복불복이다. 과일만 그렇지는 않다. 어느날은 양파를 한 망 사왔는데 한망에 들어있던 다섯개 중 세개가 속이 다 썩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사오나 다니엘이 사오나, 채소 전문점에서 사오나 모노프리에서 사오나 복불복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집은 양파랑 무슨 원수가 졌는지 안 좋은 양파 걸릴 때가 다른 과일보다 월등히 많다. 물론 맛있을 때가 없지는 않다. 드물어서 문제지. 그나마 귤 같은 과일은 형편이 좀 낫다. 문제는 딸기와 복숭아다. 언제는 딸기를 연유에 비벼먹을 작정으로 모노프리에서 딸기를 사왔었는데 이놈의 딸기가 숟가락에 으깨지지를 않는 것이다. 나는 이날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다. (한국)친구들도 곁에 없는데 과일도 없는 파리 생활이라니.



맛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과일을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원산지를 확인하면 대개는 스페인산이다. 한국도 마트에서 사온 과일이 늘 맛있지는 않다. 슈퍼에서 맛없는 과일을 속아 사는 일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마트 과일도 웬만하면 평타는 친다고 생각한다. 그런 반면 파리의 '꽝' 과일들은 수분이 하나도 없이 퍼석하거나 안이 다 곯았거나, 이거 출하 전에 검사는 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난한 과일일 때가 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가 모노프리에서 과일을 사오면 '이야, 아직도 마트 과일에 기대를 하는 사람이 여기 있네?' 라고 하고, 나는 '오늘은 맛있을 수도 있잖아' 라고 하지만 역시나 맛이 없다. 과일 전문점에 가면 확률게임의 승률은 올라간다. 그래도 안심은 금물이다. 신선해 보인다고 그게 맛있을 거라는 보증 수표는 못 된다. 딸기는 스페인산 말고 프랑스산으로 먹으면 맛이 좀 낫다고들 하는데 여기 와서 먹은 제일 맛있는 딸기도 한국산에 비하면 딱딱하고 좀더 건조했다. 요즘 샤인 머스캣에 킹스베리에 만년설딸기까지 별별 맛난 과일들이 다 나오던데 내가 한국 가는 기간을 꼭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늘 인스타그램 과일 사진만 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나마 포도는 여기서도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리고 한국 살 때는 먹어본 적이 없는 칸탈로프 멜론-요즘은 또 수입이 되는듯-도 나름대로 승률이 높았다. 맛은 조금 더 달달한 (머스크)멜론맛이었다. 작은 노란색 자두인 미라벨도 한국에서는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했다. 수박도 꽤 승률이 괜찮았는데, 이곳에서는 1/4조각씩 팔기 때문에 3인이나 4인 여행객이라면 하나를 사서 수박주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 페루산 애플망고도 맛있지만 다른 과일보다 비싼 주제에 시기를 잘못 타면 무척 상태가 안 좋은 망고들만 입고되기 때문에 눈치게임을 잘 해야 한다.



맛있는 과일을 먹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파머스 마켓을 따라다니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남부에 내려가면 된다. 산지에서 먹은 넥타린 복숭아와 납작복숭아는 정말 신선하고 달았다-물론 그 와중에도 꽝은 있었고-. 남쪽 끝까지 갈 필요도 없이 보르도만 가도 과일이 정말 맛있었다. 다니엘 부모님을 뵈러 갔을 때도 시장에서 납작복숭아를 열두 개 사서 파리에 올라왔는데 오는동안 복숭아가 약간 뭉개지기는 했지만 가치 있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바나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과일가게까지 가기 귀찮을 때면 모노프리에서 과일을 집어들며 기도를 한다. 제발, 제발...맛있는 거 걸리게 해주세요.. 그러고 나면 과일 하나 사는 게 뭐 이렇게까지 처절할 일인가 싶어서 현자타임이 온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도는 자두인지 수세미인지 모를 끔찍한 과일지뢰에 처참히 배신당했다. 차라리 그것이 유전자 조작 실패의 결실이라면 덜 놀라울 것이다.



파리는 정말 기묘한 도시다. 여기가 무슨 외진 섬도 아닌데 어느날은 오전 내내 계란 매대가 싹 비워져 있지를 않나, 폭설 이후 며칠동안 상점 매대가 텅텅 비지를 않나. 수분과 생기를 쪽 빨아먹힌 농산물을 팔질 않나. 덕분에 맛있는 과일에 더 감사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맛없을 거라는 불안을 안고 산 슈퍼마켓 커피 원두는 다니엘에게 호평을 받고, 이상하게 맛있어보여서 산 과일은 어김없이 나를 배신한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 제가 안 사먹어본 과일 중에는 무화과도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과일헌터 체리는 센강 남쪽에서 엄청 맛있는 과일가게를 발견한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하다하다 짜증이 나서 봉마르쉐 백화점 식품관에 갔을 땐 모든것이 너무 신선해서 놀랐지만 이돈 주고 사먹었다가 맛없으면 그 분노를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어 아직 안 사먹어봤습니다. 나중에 백화점 과일 사먹어 본 후기는 인수다에 남기겠읍니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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