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싫은 말
이사는 업로드 시점(22일)에서 1주일 전에 청소까지 끝마쳤다. 아래 문단부터 이어지는 글은 이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써 두었지만 함께 올릴 만화를 그릴 짬이 도저히 나지 않아 시간 맞춰 업로드를 하지 못했다. 언젠가 연필로 스케치만 끝낸 만화를 보면서 ‘급할 땐 채색 안 하고 이대로 올려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에 솔깃하긴 했지만 정말 부득이할 때가 아니면 그건 피하고 싶다. 알록달록한 게 좋다. 게다가 정말 급해서 스케치만 그린 만화를 올려도 나중에 채색한 에피소드들 사이에 스케치만 올라간 만화들이 눈에 띄면 나중에라도 색칠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약간 오래된 일이지만 다니엘과 복사집에 다녀오느라(당시에는 집에 프린터가 없었다) 꽤 먼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택배 아저씨가 집에서 20분 떨어진 곳에 택배를 맡겼을 때나 복사집처럼 살짝 먼 곳에 떨어진 곳을 방문할 때가 아니면 늘 가던 곳만 들르기 일쑤라 내 딴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저기를 스캔하느라 바빴었다. 거리의 풍경이 슬슬 눈에 익기 시작할 때, '아 여기부터는 아는 곳이다' 같은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내 앞을 지나가던 아프로 파마 총각이 매우 화를 내면서 우리 동네를 욕하는 게 아닌가! 대강 '이 망할 놈의 동네는 까르푸도 없고 아주 무슨 사막을 걸어가는 기분이야, 망할 놈의 배터리 하나 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말도 안 돼 아주 망할 놈의 동네야' 같은 내용이었다. 그때 그 총각에게 꽤 진심으로 화가 났었다. 그게 며칠 전에야 기억이 났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 그렇듯이 나는 프랑스에 살기 시작하면서 불평하기 바빴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출근길에(예전에 아직 일할 때) 지하철역에서 나는 익숙한 방귀 냄새나 지린내가 코를 스치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고 별로 달라진 것도 없다. 저번 주에 말한 것처럼 나는 아직도 하우스 딸기에 햇사레 복숭아 같은 것들을 그리워하고, 그건 아마 몇 년을 살아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내가 그 총각한테 꽤나 화가 났다는 사실이 떠오르자마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리 욕하는 건 괜찮지만 우리 동네 욕하는 건 못 참아' 이런 건가. 딱히 동네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때가 아마 공휴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각아.. 공휴일에 안 여는 슈퍼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한국인인 나도 아는데 프랑스 원 데이 투데이 사는 것도 아니고 엄한 남의 동네 욕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며 소심하게 그의 머리끝을 노려봤던 기억이 난다. 여기가 얼마나 살기 좋은 동넨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다고 다른 구, 다른 골목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마음속으로 우리 동네를 옹호했었다. 정말로 이상하다. 파리 욕하는 건 나도 합세해서 신나게 욕할 수 있는데 우리 동네 욕하는 건 듣기 싫다.
그때 총각이 걷던 길목 주변만 해도 까르푸에 프랑프리, 모노프리같은 슈퍼마켓이 적지 않았다. 오전이었으니 그중에 적어도 하나는 열려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전화 통화만 잠시 중단하고 구글 맵으로 자기가 어디 있는지 찾아만 봤어도 그 총각 말마따나 사막을 걷는 기분은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니가 우리 동네 정육점 베이컨 맛을 봤어!! 니가 어?? 5분 거리에 지하철역 세 개가 다 있는 이 동네의 멋짐을 아느냔 말이다! 나는 느그 서장과 자신을 관계를 목놓아 어필하던 최민식이 된 기분이었다. 욕을 할 거면 팩트를 들고 와서 욕을 해야지 말이야! 우리 동네 빵 맛도 모르면서. 그러는 나도 다른 동네 빵 맛은 모른다만.
이사를 앞두고 가능한 한 지금 사는 집과 가까운 거리에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라 그런가. 정말 뜬금없이 그때 생각이 났다. 이놈의 파리, 고층 건물 허가도 안 내주고 학생들이 하녀방으로 내몰리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건축정책 때문에 우리도 부동산에 낼 서류 준비하느라 눈알이 빠지는데 뭐가 이쁘다고 이 동네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정을 붙였나 모르겠다. 우리 동네는 내가 비자를 더 받든 못 받든 눈 하나 깜짝 안 할 텐데 말이다. 사랑 중에서도 제일로 치사하다는 짝사랑이다. 캐리어에 지게차에 난리 법석 떨며 이사 다닌 세월이 길어서 그런가, 나무 창틀 사이로 외풍이 들어오고 우리 앞으로 온 택배가 이상하게 자주 사라지는 이 아파트-얼마 전에는 카메라를 샀는데 11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보니 관리인이 1주일 동안 보관하면서 아무 언질도 주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우편이나 택배는 다 줬으면서..-를 떠나는 게 마냥 기쁘긴 한데 또 조금 불안하다. 이제 이사와는 좀 이별하고 싶지만 전세 제도도 없고 내 나라도 아닌 곳에서 그런 희망은 품지 않는 것이 내게 이롭다. 정이라는 게 정말 치사하다. 지금까지 본 집 중 어디로 이사를 가더라도 나는 빠르게 적응하겠지만, 새로운 골목에서 또 별 쓸데없는 것들을 그리워할 테니까.
매번 이놈의 파리, 이놈의 파리 해도 미운 정이 무섭다는 걸 안다. 미운 정으로나 뭐로나 어차피 잃고 나서 그리워할 거라면 실컷 즐겨 두기라도 하는 게 이득이다. 이런 계산으로 파리를 좀 더 즐겨 보기로 했다. 어떻게 즐길지는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